엄청나다. 삼성그룹이 최순실-정유라에게 이미 쏟아 부었거나 쏟아 부으려던 지원 규모는 적게는 수백억원, 많게는 천억원대를 웃돈다. K스포츠·미르 재단에는 204억원이나 퍼 줬고, 삼성전자 사장까지 독일에 날아가는 것을 전후해 정유라씨 지원을 위해 280만유로(약 30~35억원)가 송금됐는가 하면, 2020년 정유라 씨의 도쿄 올림픽 출전 지원을 위해 대한승마협회와 한국마사회가 2014년 말부터 800억원대 프로젝트를 운영했단다.

삼성그룹 쪽은 검찰 수사 중인 사안이라 답변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식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미 한 차례 검찰이 관련 대기업들을 불러다 물어봤을 때, ‘말 산업 육성이나 말 산업 관련 미래 스포츠 꿈나무 육성을 위해 앞장섰다’고 둘러대지 않았을까 싶다. 이런 답변을 믿기 어려워서인지, 아니면 뒤져봤는데도 대가성을 찾기 어려웠다고 빠져 나가기 위한 검찰의 알리바이 용도였는지 모르겠지만, 검찰은 최근 삼성전자와 한국마사회에 대한 압수 수색을 벌였다.

삼성그룹이 저런 지원을 꾀했다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할 정도의 대가를 챙길 수 있는 분야는 그리 많지 않다. 예를 들어, 이재용 씨로의 회사 승계 과정에서 봉착한 난관을 돌파하거나, 그룹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고 지키는 데 대한 선제적인 대응의 필요성 정도가 꼽힐 만하다. 삼성전자가 1995년부터 2010년까지 15년 가까이 대한승마협회 회장사로서 자체 승마 선수단을 운영하면서 했던 활동도 후자의 한 예라고 할 만하다. 그랬던 삼성전자는 2010년 회장사 지위도 내려놨고 선수단까지 해체했다.

8일 오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검찰의 압수수색이 진행되어 기자들이 몰려 취재에 한창이다.(연합뉴스)

2013년 7월 삼성의 거버넌스 재편과 2014년 11월 국민연금의 합병 반대

관심은 이재용 씨로의 회사 승계 과정으로 쏠린다. 2015년에는 이 승계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삼성물산·제일모직(옛 에버랜드) 합병 건이다. 그해 5월26일 합병 계획을 공시할 때 제일모직·삼성물산의 합병비율은 1 대 0.3500885였다. 기준은 5월22일 종가였다. 그때 삼성물산의 주가는 매우 저평가, 제일모직의 주가는 매우 고평가된 불균형 상태였다는 게 수많은 전문가들의 지적이었다. 세계적인 의결권자문기구인 ISS, 글라스루이스 및 국내 의결권자문기구인 기업지배구조원, 서스틴베스트 등이 합병비율의 심각한 불공정을 이유로 반대를 권고했다. 경제개혁연대의 분석에 따르면, 삼성물산의 시가총액은 그때 삼성물산이 보유 중이던 계열사 주식의 가치 13조434억원을 밑도는 수준이었다. 결국 그때 합병비율은 삼성물산의 영업용 자산의 가치를 마이너스로 평가한 것에 해당하는, 극도로 비상식적인 것이었다는 얘기다.

반발이 없을 까닭이 없다. 외국계 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지분 7.12%)가 6월4일부터 공식 반대를 밝혔고, 이에 동조하는 외국인 지분이 26.7%나 됐다. 삼성의 우호지분은 삼성SDI(7.39%)를 포함해 19.55%에 그쳤다,. 이것도 삼성물산이 의결권이 없는 자사주를 KCC에 매각하며 의결권을 부활시켜 우호세력으로 끌어들인 결과다. 합병 성사의 열쇠를 쥔 건 9.79%를 보유해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이었다. 국내 기관투자자들은 국민연금의 눈치를 보며 예의주시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2014년 11월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 계획에 대해 각각 5.9% 보유 중이던 국민연금이 반대 의견을 내면서 합병이 무산된 전례가 있던 터라 삼성이 얼마나 초조했을지는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옛 에버랜드)의 합병은 이재용 씨 등 3세로의 경영권 승계를 목적으로 한 2013년 7월부터 시작된 삼성의 거버넌스 개편에서 일종의 정점에 해당한다. 태어날 삼성물산에서 이재용 씨를 비롯한 일가는 30.4%를 보유하게 된다. 삼성SDI 등 3개 계열사 지분 8.8%를 더하여 전체 그룹을 지배하게 되는 지주회사를 틀어쥐는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재용 씨가 삼성생명을 거쳐 삼성전자를 지배하던 순환출자의 고리도 끊는 효과도 거둔다.

삼성전자, 다시 대한승마협회 회장사 되다

바로 여기에 최순실·정유라를 대입해 보자. 먼저 최근 ‘최순실 씨와 일면식도 없다’며 잡아뗀 현명관 한국마사회 회장이 등장한다. 그는 호텔신라 부사장과 삼성건설 사장, 삼성물산 회장, 전경련 상근 부회장을 거친 삼성맨이다. 친박 대선캠프 정책위원을 하다 2013년 12월 한국마사회 회장으로 앉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앞서 말했다시피 경영권 승계 목적을 위한 삼성의 거버넌스 재편은 2013년 7월 삼성물산의 삼성엔지니어링 지분 인수를 시작으로 본격화했다.

그러던 중 2014년 11월 국민연금의 반대로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 합병이 무산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고 대한승마협회와 한국마사회에서는 2014년 말부터 최순실·정유라를 염두에 둔 800억 원대 꿈나무 프로젝트가 가동되기 시작한다. 승마 선수단까지 해체했던 삼성전자는 공석으로 있던 대한승마협회 회장사로 2015년 1월 다시 앉는다. 그 뒤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K스포츠·미르 모금이 7월부터 시작됐고 삼성은 204억원을 내기로 한다.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옛 에버랜드) 합병 주총이 열리고 여기서 국민연금이 예상을 깨고 합병에 찬성한다.

합병 찬성 앞두고 벌어진 국민연금의 이상한 행태

그때 합병 찬성은 분명히 예상을 깨는 일이었다. 같은 해 6월24일, 그러니까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주총이 열리기 20여일 전에 국민연금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는 합병 비율이 부적절하다며 SK-SK C&C 합병에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주총 때 국민연금은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기금운용본부 투자위원회가 찬성 결정을 내렸다. 의결권행사전문위는 어떤 의견을 냈는지 등 의혹을 확인하기 위해 회의록을 공개하라는 경제개혁연대(소장 김상조)의 행정소송이 현재 진행 중이다.

그때 국민연금은 삼성물산의 지분 9.79%를 소유한 최대주주였다. 제일모직에 대한 국민연금의 행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2014년 12월18일 제일모직이 상장된 날로부터 2015년 5월25일 합병 발표 전까지 불과 5개월 사이에 국민연금은 약 600여만 주 (4% 지분)를 낮은 가격에 매도하여 주가를 5만원대로 끌어내렸고, 2015년 5월26 일 합병 발표일부터 2015년 6월 9일 까지 불과 보름만에 300여만주 (2%지분)를 높은 가격에 매수하여, 주가를 상승시켰다. 그리고 2015년 7월8일 국민연금은 제일모직 지분 5.04%를 신규 확보했다고 공시한다. 쉽게 말해 팔아치워 주가를 끌어내리고 한창 오를 때에 되샀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된다. 합병에 반대하면 제일모직 주가가 떨어져 손해를 보게 되는 상황을 인위적으로 조성했다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한 셈이다.

여기에 한 명을 더 등장시켜 보자. 바로 안종범 전 수석이다. 그는 2014년 6월부터 올해 5월까지 경제수석을 지냈다. 대통령 지시를 받아 K스포츠·미르 재단에 대한 대기업 출연을 앞장서 독려했다고 본 인물이다. 국민연금에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하라는 지침을 내려보낸 고리로서 기능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그러면 이제 그림이 그려진다. 삼성은 최순실·정유라를 매개로 하여 대한승마협회, 한국마사회, 안종범 등 다양한 단체와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국민연금에 접근한 것이다. 검찰이 지난 8일 한국마사회와 삼성전자에 대한 압수 수색을 벌인 이유도 이런 그림을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있다. 의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국민연금을 압수 수색 대상에 빼놓지 않는다면, 검찰의 의지에 쏟아지는 의혹의 눈초리는 많이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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