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키드 뉴스>가 한국에도 상륙했다. 1999년 캐나다에서 처음 인터넷 방송으로 시작해, 지금은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일본어로도 방송하고 있고, 자기네들 말로는 전세계 시청자가 1천만명에 이른다고도 한다. 앵커가 옷을 입지 않은 채 등장하거나 뉴스를 진행하면서 옷을 벗는다고 하니, 얼마나 오래 갈지는 모르겠지만 호기심에 한두 번 시청할 이들은 적지 않을 것 같다.

▲ 네이키드 뉴스 코리아 홈페이지 캡처.
이 포맷이 당혹스러운 건 단순히 ‘노출’ 때문만은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노출은 차고 넘친다. 당혹스러움은, 노출이 다른 곳도 아닌 저널리즘 자체에서 이뤄진다는 데서 온다. 대놓고 선정성을 표방하지 않는 한 저널리즘의 표정은 (적어도 겉으로는) 엄숙하다. 설령 선정성을 내세우는 언론이더라도 뉴스 전달자의 몸을 직접 ‘전시’하는 일은 없다. 저널리즘은 자기 스스로를 노출하는 법이 없다.

반면, 네이키드 뉴스가 전시하는 것은 전달자의 몸 자체다. 시청자들도 전달자의 몸을 눈으로 소비한다. 앵커는 관음의 대상이다. 몸이 관음의 대상으로 소비된다는 점에서 저널리즘 문법보다는 포르노그라피 문법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진행자가 하나같이 여성이라는 점에서, 포르노그라피에서 작동하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권력감정도 그대로 재현된다. 뉴스는 상황설정을 위한 소품일 뿐이다.

그렇다고 기존 저널리즘이 이들보다 엄숙하다는 건 아니다. 어느 석간신문은 포르노에 가까운 소설을 매일 연재한다. 스포츠신문 지면은 여성 노출사진과 성산업 광고로 도배된다. 자신을 직접 전시하는 대신 ‘매개’한다는 차이만 있을 뿐, 음란하기로 치면 이들이 한 수 위다. 적나라한 노출보다는 몇 가지 ‘암시’의 기호들을 서사적으로 배치해 연상작용을 일으킬 때 음란 수위는 고조된다.

정작 자신의 몸은 드러내지 않은 채 몸을 상품으로 유통하고 돈을 버는 건 포주의 직업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 언론이 포주와 다른 건 짐짓 엄숙한 이데올로기를 앞세운다는 것뿐이다. 문제의 석간신문은 ‘성상납의 증거’라며 어느 여성의 알몸사진을 대문짝만하게 싣고는, ‘국민의 알권리’ 차원에서 공개를 결정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신문이 말한 ‘국민의 알권리’는 ‘남성(권력)의 볼거리’였을 뿐이다.

네이키드 뉴스의 출현이 기존 저널리즘의 이중성을 풍자하기 위한 기획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들 스스로 압도적 관음사회의 정치·경제학적 전형성을 드러내고 있다. 다만 이들과 이들의 출현을 보도하는 기존 저널리즘이 그림자놀이 하듯 서로 어룽대면서, 기존 저널리즘의 은밀한 선정성이 좀더 가시화되는 효과는 기대할 수 있겠다. 그것이 “답답한 현실, 통쾌하게 날려드리겠다”는 이들의 구호가 실현되는 단 한 군데 지점이 아닐까.

※ 이 글은 <한국방송대학보> 제1546호(2009-06-29)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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