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를 방문해 정세균 국회의장과 회동한 이후 정국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선 것 같은 모양새지만 결과적으로는 자기 지지층의 결집을 유도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야권으로서는 힘든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가 왔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8일 정세균 국회의장과 13분 동안 만나 내놓은 메시지는 국회가 추천하는 인사를 총리로 받아들이고 김병준 총리 후보자 카드는 거둬들이겠다는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가 추천한 총리에게 “내각을 통할하도록 하겠다”, “실질적 권한을 보장하는 취지를 살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등의 발언을 한 것으로도 알려진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러한 입장은 그간 야권이 내놓은 요구 중 일부만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대통령의 2선후퇴를, 국민의당은 대통령의 탈당을 각각 거국중립내각 구성의 전제로 언급해왔다. 새누리당은 야권의 이러한 요구에 “식물 대통령을 하라는 것”이라며 거부반응을 일으켜 왔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날 메시지는 2선후퇴나 탈당 요구 등을 받아들인 것은 아닌 걸로 보인다. 즉, 국정에서 완전히 손을 떼기보다는 헌법상의 총리 권한을 보장하겠다는 정도다.

박근혜 대통령이 8일 오전 정세균 국회의장과 시국 논의를 위해 국회 본청에 도착하고 있다. (연합뉴스)

언론 보도를 보면 청와대의 기류는 야권이 요구하는 사실상의 완전한 국정 포기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에 가깝다. 양보할 수 있는 최대치로서 대통령이 외교 안보 관련 정책을 담당하고 국무총리가 내치를 전담하는 일종의 ‘분권형’ 모델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야권의 요구는 대통령이 단지 임기를 채울 수 있도록 할 뿐 거의 모든 권한을 국무총리에게 위임하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양쪽 다 대통령중심제를 택하고 있는 현 헌법의 취지를 거스른다는 비판이 가능하다는 거다.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직무를 대신 수행할 수 있는 경우는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사고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로 정해져 있다. 대통령이 자리를 지키고 있고 별다른 사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선거를 통해 선출되지 않은 국무총리가 통치 전반에 대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위헌적 발상이라는 주장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외치와 내치를 나눠 담당하는 ‘분권형’의 경우도 이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주장하고 있는 바는 헌법상에 규정된 국무총리의 권한을 최대한 보장해주겠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론 이마저도 법률상의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국무총리의 권한의 내용과 범위를 놓고 정치권이 또 다른 논란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법률은 대통령이 자기 직을 지키는 한 언제나 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이 스스로 ‘하야’를 선택하지 않는 한 이러한 문제는 해소되지 않는다.

야권이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방문 직후 “시간벌기용 국면전환용 국회 방문”이라는 것 이상의 입장을 내지 못하는 것에는 이런 사정이 있는 걸로 풀이할 수 있다. 여야3당 원내지도부는 이날 정세균 국회의장과 회동을 가졌으나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입장을 정리한 후 다시 회동하기로 했다. 이와 별개로 야3당은 9일 회동해 이번 사건에 대한 공동대응 내용과 수위를 협의하겠다는 입장이다.

야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여전히 두 가지다. 하나는 이른바 ‘단계적 퇴진 투쟁’의 기조를 유지하는 것이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통치를 어떤 방식으로든 포기하지 않는 한 책임총리, 거국내각 구성은 불가능하고 이것이 관철되지 않을 시에는 탄핵소추안 발의까지도 고려할 수 있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야권이 이 길을 선택하면 앞으로 일정 기간 동안은 대통령의 권한과 헌법의 문제에 대해 지리한 정치적 공방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시나리오에서 ‘거리의 정치’가 지금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면 실제 박근혜 대통령이 하야를 선택할 가능성도 없는 게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8일 오전 정세균 국회의장과 면담하기 위해 국회를 전격 방문, 로비에서 '하야' 촉구 피켓시위를 하고 있는 정의당 의원들 앞을 지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장외정치의 열기가 식어 버리면 이 전략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여러 무리수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지금 태세를 유지하는 것은 자기 지지층의 결집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사과에 대국민담화, 국회 방문 등을 통하여 뒤늦게라도 사태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 하는데 야권이 차기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이를 외면하고 국정을 해태한다는 주장이 반드시 보수층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지지층 결집은 국회와의 협상을 위한 지렛대다. 이 경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야권이 쥐고 있는 어드밴티지는 축소될 가능성이 크다.

야권이 선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전략은 어떻게든 합의할 수 있는 수준에서 새로운 국무총리를 추천하고 조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 경우 국회 추천 국무총리 후보자가 누가 되느냐가 갈등 요소일 수 있다. 그런데 애초 김병준 국무총리 후보자가 언급될 때 함께 하마평에 올랐던 손학규 전 의원이나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전 비대위 대표, 또는 그 이외의 누구라도 이런 방식으로 국무총리를 맡게 되면 앞서 언급한 권한 문제의 수렁에 다시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를 대하는 정치권의 실천적 결론은 결국 ‘개헌’을 논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권력구조의 개편 정도로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같은 일의 재발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라고들 하지만 과연 그런지 가까운 일본의 사례를 볼 필요가 있다.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은 양원 모두 자민-공명 연립정권의 독주체제다. 집권 자민당은 총재 임기를 현행 ‘중임 6년’에서 ‘3선 9년’으로 연장하는 당규 개정 방침을 확정했다. 일본의 경우 통상 다수당 총재가 수상을 맡기 때문에 이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3선 개헌’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의 효과다. 언론은 2021년까지의 장기집권 길이 열렸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런 판국인데도 아베 신조 내각은 집권 4년차에 50% 안팎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체제가 5년 단임의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결국 단순한 권력구조 개편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가 국민의 의지를 얼마나 반영하는가, 어느 정도 수준에서 소화하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유럽 각국에서 그 나라가 어떤 권력체계를 택하고 있는지와는 관계없이 극우정치가 돌풍을 일으킨 것이나 4년 중임 대통령제인 미국에서 기존 정치가 포괄하지 못하는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이 대거 등장한 것도 마찬가지다.

즉,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은 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기본으로 하는 정치사회적 구조의 변화로서 해결 가능한 것이지 분권형 대통령제냐, 내각제냐, 4년 중임제냐의 문제와는 별 상관이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헌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마치 1987년의 그것과 같이 한국사회 전체의 변화를 가져오는 혁명적 수준의 것이 되어야 한다.

즉, 우리는 다시 ‘거리의 정치’를 말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헌법을 거부한 대통령의 통치를 중단시키기 위해서도, 민의를 반영한 헌법 개정을 하기 위해서도 더 많은 사람들이 직접적인 행동에 나서야 한다. 야권의 정치는 서로 강온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이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대중적 지지가 있어야 국회 추천 국무총리가 등장하더라도 실질적 통치를 가능케 할 수 있다. 지금 이대로라면 새로운 국무총리에 의한 거국중립내각은 마치 러시아의 2월 혁명 이후 케렌스키 임시정부와 같은 말로를 맞이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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