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renaissance), 사회 모든 분야가 어렵거나 혹은 퇴행하는 주술로 난리 굿판이 벌어지고 있는 시절이다.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어쩌면, 그럭저럭 모든 것이 아름다웠노라고 기억되던 그런 시절에 관한 것일지도 모른다. 기억, 추억, 낭만과 같은 단어들이 세상을 지배했던 이야기.

▲ <친구, 우리들의 전설> 제작발표회ⓒmbc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2000년 초반의 몇 년까지는 단연 모든 것이 한국영화에 호기롭게 작용하던 시절이었다. 르네상스의 물결이 한국 영화에 절정의 감읍을 미치던 시절이었다고나 할까. 영화의 폭발력은 다른 모든 문화 장르를 단연 압도했다. 아직도 미스터리와 같은 그 기이한 현상에 대하여,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가능케 한 근원이 무엇이냐에 관해서는 분분한 ‘설’들이 있다. 하지만 지금 하려는 얘기는 이제는 대한 늬우스를 하지 않는 극장을 찾아 가야하는 르네상스 이후의 비애에 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과거의 사실에 관한 것이다. 곽경택의 <친구>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전체를 통틀어 가장 화려한 한 장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곽경택의 작품론을 정리하는 일은 여러모로 억지스럽게 느껴진다. 그는 김기덕처럼 답습과 진화 사이의 경계에서 외로운 줄타기를 해 온 것도 아니고, 박찬욱마냥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끝까지 밀어붙여 관객들을 당황하게 만들어 온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봉준호 감독마냥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필모그래피를 써 온 것도 아니고, 홍상수처럼 자본과 불화하되 영화 문법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을 해오지도 않았다.

▲ <무릎팍도사>에 출연했던 곽경택 감독
오히려 그의 영화는 언제나 부산 언저리를 쏘다니는 남자들의 잔혹사에 관해 말할 때만 빛났을 뿐이고, ‘사랑, 믿음, 소망 그 중에서 제일은 언제나 의리’라는 과격하게 단순한 세계관을 설파해 온 진부한 필모그래피를 갖고 있다. 그는 종종 최고의 배우들을 싹쓸이해 어이없는 졸작을 만들었고, 블록버스터의 문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투자된 자본과 불화를 겪어 왔다. 말하자면, 그는 정색하고 과잉된 언어로 추켜 세워주기에는 부족하고 그렇다고 무시하고 지나치기엔 너무 열정적인 감독이다. 그런, 그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야 하는 것일까?

곽경택은 여전히 <친구>이다. 그는 총 8편의 영화를 연출했고, <친구> 이후에만도 5편의 영화를 더 했지만 여전히 <친구>의 감독이란 칭호를 벗지 못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그의 영화 중에 <친구>가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친구> 이전의 그의 영화는 너무 보잘 것 없었고, <친구> 이후의 그의 영화는 <친구>에 대한 변주이거나 답습 혹은 결별을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었다.

예컨대, <챔피온>(2002)의 김득구는 죽음을 불사한 인정투쟁을 벌이던 동수의 제도화된 버전일 뿐이었고, <똥개>(2003)의 정우성은 비장미를 제거한 운명의 친구들은 어찌되는가에 관한 얘기였다. <태풍>(2005)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지 않는 조건에서의 곽경택 영화가 얼마나 하찮아질 수 있는가를 보여줬고, <사랑>(2007)은 결국, 곽경택 감독이 서있는 자리가 여전히 <친구>의 그 자리임을 절절하게 드러낸 영화였다. 그리고 그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2008)를 거쳐 정말 다시 <친구>로 돌아왔다.

너무나 뚜렷한 한 편을 제외하곤 그다지 대중의 찬사를 받는 영화를 만들지 못했었고, 답보에 빠진 감각, 지나친 자의식 그리고 그밖의 어떤 것들이 범벅되어 평단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했던 완연한 하락세의 감독이 전시대의 지배자로 머물지 않고, 동시대의 연출자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의 무기는 여전히 그의 세계관이 세상을 지배했던 똑같은 이야기이다. 20부작으로 제작되는 친구는 ‘우리들의 전설’이란 꼭지를 달고 있다. 앞서 말한 기억, 추억, 낭만 같은 것들을 적극적으로 불러내는 문장이다. <친구>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기록했더라면, 이 드라마는 그 르네상스 이후의 르네상스를 복원하는 꿈을 꾸는 프로젝트일는지도 모르겠다.

이 글에게 주어진 원래의 목적은 ‘곽경택론’을 쓰는 것이었다. 꾸준히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의 흔적들을 살피며, 곽경택 개인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드라마 <친구>가 어쩜 영화 <친구>와 그 이후 노출된 그의 한계를 시험하는 작가로서의 마지막 기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을 남성의 운명에 종속된 부차적 존재로 다룬다는 오해에 관해 그는 보강된 내러티브를 갖고 브라운관을 통해 어떻게든 답을 해야 할 것이다. 질펀한 경상도 사투리를 지우면 상상력에 제약이 일어난다는 세간의 평가에 대해 그는 그나마 욕마저 빼앗긴 채 불특정 보편의 눈높이에 맞는 감칠맛을 20부 내내 유지해야 하는 시험에 들어있다. 100% 사전제작이라고 하니 어쩌면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친구>가 개봉했을 무렵, 한참 영화에 빠져 지냈었다. 메가히트를 기록한 영화에게 관대하지 못한 씨네필들 사이에 끼어 있었지만, 난 그 영화 괜찮게 봤다. 한국사회에서 남자는 그렇게 한번쯤 누구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운명에 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자라난다. 딱, 거기까지였다. 8년의 시간이 흘렀다. 시간을 견뎌 온 곽경택은 또 다시 마초의 아야기를 할까? 아니면 사람의 이야기로 진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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