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한국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김씨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분명 언론과 전화통화까지 나눈 김씨였는데,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수사는 그렇게 ‘중단’되었다. 4월24일 일이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고, 김씨가 일본에서 체포되었다. 그가 체포되자 고 장자연씨에게는 상처였던 유품 ‘장자연 리스트’를 둘러싼 경찰 수사가 급물살을 탈 것이라고 숱한 언론이 전했다. 장자연 리스트를 수사하던 경기 분당경찰서는 김씨가 일본에서 체포되자 “사건 관련 입건자 9명과 내사중지자 4명 등 모두 13명에 대해 먼저 집중 수사가 이뤄질 것”이라며 “내사 종결자라 하더라도 김씨의 진술에 따라 혐의점이 발견될 경우 다시 수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다시 수사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헌데 경찰의 ‘수사방향’을 두고, 음흉한 기운이 감돈다.

실제로, 장자연 리스트에 대한 경찰의 수사 중간발표는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진실 규명은커녕, 오리무중 김씨를 핑계 삼아 수사 중단을 결정하였다. “사실관계가 정확하지 않고, 혐의의 정도도 낮다고 판단해 별도로 피의자로 입건하지 않고 수사를 중지하기로 했다”는 경찰의 한 마디는 장자연씨의 죽음 앞에 ‘공분’했던 이들에게 또 한 번의 분노를 안겨다 주었다. 게다가 장자연 리스트에 언급된 언론사 대표의 성씨와 언론사 실명을 밝히며 무엇보다 ‘경찰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한 이들에 대해 조선일보는 명예훼손을 들먹이며 고소하였다. ‘리스트’를 쥔 채 산으로만 향하던 경찰은 결국 덜컥 주저앉아 버렸다. 연예계의 ‘성상납’ ‘성접대’라는 폭력을 둘러싸고 있는 재계·언론계의 권력 앞에서 스스로 머리를 조아린 꼴이었다.

▲ '고 장자연 특검제 도입을 촉구하는 국민청원’ 서명운동 홈페이지 화면 캡처
보다 못한 시민들과 야당, 시민단체들이 나서 장자연씨 관련 성상납 강요 의혹에 대한 특별검사제 도입을 촉구하는 국민 청원을 제기하였고, 여성연예인 인권지원 서포터즈 ‘침묵을 깨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출범하였다. 고 장자연씨 죽음에 대한 성역없는 수사를 촉구하며, 여성연예인의 인권을 확보해야 한다며 네티즌들은 자발적으로 ‘할말 많은 UCC 행동단’을 구성하여 현재까지 9편의 동영상을 제작하였다.

헌데 경찰은 꼼짝없이 김씨만을 기다렸다. 김씨를 방패삼아 장자연 리스트 수사를 방관해왔다. 그렇담, 김씨가 돌아오면 경찰은 과연 달라질까. 당연한 일들이 범죄가 되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보니 걱정부터 앞선다.

하여간 경찰은 재수사를 한다고 밝혔고, 김씨가 곧 일본에서 강제추방된다고 하니 장자연 리스트를 둘러싼 연예계의 추악한 욕망에 고리가 끊어져야 할텐데… 신문을 뒤적거리며, 클릭직을 하다 보니 요상하다.

도쿄시내 완간 경찰서에 불법 체류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는 김씨가 장자연씨의 자살 이유에 대해 ‘성접대’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고 일본 교도통신이 보도했다는 것이다. MBC 보도는 보다 구체적인데, 김씨는 장자연씨가 계약기간 중에 다른 기획사로 옮기는 바람에 소송을 준비 중이었다. 이 압박감 때문에 장씨가 자살했을지 모른다고 진술한 것이라고 알려졌다는 것이다. 핵심을 비켜가지 말아야 하는데, 김씨의 발언에 언론들은 쉽게 반응하기 시작하였다. 경찰이 수사해야 하는 것은 장자연씨의 자살 사유일까. 장자연씨가 남긴 유품일까.

장자연 리스트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판단되는 김씨는 일단, 선수 쳤다. 김씨는 리스트를 둘러싼 온갖 추잡함에서 살짝 벗어나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생을 마감한 장자연씨의 이야기를 들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녀의 자살 사유가 ‘A가 아니고 B다’라고 그 누가 단정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언론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몹시 거슬린다. 억측일 수도 있다고? 100에서 2정도는 인정할 수 있지만, 물타기로 본질 흐려지는 일이 원체 비일비재하다보니 시선이 고울 수 없다.

▲ 6월 25일자 조선일보 A10면
헌데, 요상함을 넘어 음흉한 기운을 풍기는 신문이 있으니, 그래 그렇다. 조선일보다. 조선일보는 지난 25일 <중단된 ‘장자연 사건’ 수사 급물살 탈 듯>이라는 깔끔한 제목의 보도에서 “경찰이 변죽만 울리는 사이, 일부 인사와 네티즌은 확인되지 않은 루머를 토대로 수많은 유력 인사들의 실명을 언급하며 ‘인격 살인’을 자행했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이어 26일에는 <‘장자연 사건’ 수사 재개… 문건 작성 의도 밝혀지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경찰의 조사 방향을 제시하였다. “△‘문건’에 왜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이 담기게 됐는지 △무슨 용도로 ‘문건’이 만들어졌는지 △장씨가 자살을 선택한 것과 ‘문건’의 관련성은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 사설 <경찰, 이젠 장자연씨를 죽음으로 몬 세력 밝혀낼 차례>에서는 “경찰이…꾸물거리는 사이 밑도 끝도 없는 ‘장자연 리스트’가 번지면서 갖가지 의혹과 루머가 우리 사회를 흔들어댔다. 장씨는커녕 김씨와 일면식이 없는 인사들이 리스트에 올라 명예에 막대한 상처를 입었다”고 주장하였다. 덧붙어 “경찰은 김씨가 실제로 어떤 인사에게 어떤 접대자리를 마련했고, 어떤 인사가 애꿎게 루머에 오르내렸는지도 김씨 입을 통해 낱낱이 확인해야 한다” “경찰은 장씨의 자살 이유와 연예계 착취구조를 파헤쳐 ‘장자연 리스트’와 관련한 의혹과 루머와 비방이 더 이상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김씨가 국내에 없다는 걸 이용해 악의적 중상(中傷)에 발벗고 나섰던 세력에게도 그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해야 한다”며 경찰에게 촉구하였다.

▲ 6월 26일자 조선일보 사설
확실히 빗나가고 있다. 조선일보는 잿밥에만 침을 삼키고 있다. 장자연 리스트에 담겨 있던 무시무시한 재계·언론계와 연예계의 몹쓸 고리보다는 조선일보의 억울해 마지않는 ‘의혹’을 씻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조선일보는 김씨가 하루빨리 돌아와 장자연씨의 죽음을 둘러싼 연예계의 검은 커넥션이 아니라 조선일보에게 ‘인격 살인’을 가한 이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해달라며 칭얼거리고 있다.

장자연씨의 죽음이 던진 사회의 추악한 구조를 깨끗하게 지우고, 조선일보식 문법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왜 사실과 다른 ‘문건’을 어디에 쓰려고 만든 건지, 결국 장자연씨의 자살과 문건의 관련성은 있는 건지. 그렇다. 행여 문건이 순수하지 않은 이유에서 작성된 것이라면, 그리고 문건과 장자연씨의 자살이 연관성이 없다면 불똥은 피할 수 있다는 셈법이다. 게다가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하니, “경찰은 이미 김씨의 집과 사무실 등 27곳을 압수수색해 회계장부 등 자료 842점, 통화내역 14만건, CCTV 기록 등을 확보했다. 경찰은 특히 ‘조선일보 특정 임원’과 관련해 김씨 전화 3대와 장씨 전화 3대의 1년 통화내역 5만여건을 대조한 결과 이 임원과 단 한 건의 통화도 없었으며, 이 임원의 행적기록과 증인의 증언을 대조한 결과 이 임원이 장씨를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다고 밝혔다”는 게 조선일보의 근거다. 경찰 체면도 생각해 줘야 할 일 아닌가. 이 정도도 안 한다면 어디 경찰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뉘시라고. 증거 확보를 위해서 신중하고, 구체적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김씨의 체포는 고 장자연씨의 고통, 그리고 여성 연예인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치유할 수 있는 무엇인데, 그것이 본질이자 핵심인데. 조선일보가 난데없이 누명을 뒤집어 썼다며 재촉하고 나서니, 음흉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다. 연예계의 성상납과 추악한 권력의 욕망의 꼬리가 잡혀야 하는 것이 사건의 핵심인 것은 확실하다. 허나 김씨가 체포되자마자 칭얼거리는 조선일보를 보고 있노라니, 향후 경찰의 수사방향과 조선일보의 기사가 어떻게 조합되는지, 흥미롭고 놓칠 수 없는 관전 포인트가 하나 더 생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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