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의 기대는 ‘이실직고’였다. 사실로써 아뢰라는 거였다. 하지만 4일 발표한 대통령의 담화문에는 없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불리는 지금의 사태는 순실의 방자한 방종의 결과란다. 순실이의 개인 일탈이라는 거다. 본인의 불찰이 가장 크며 검찰 수사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했지만 이건 ‘립 서비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곁을 지켜”준 순실이에게 “경계의 담장을 낮췄던 것” 정도가 자신의 책임이라고 한다. 검찰 수사에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준 것이다. ‘대통령이 시켜서 한 일’이라고 불어버린 안종범 씨에게 일종의 시그널을 주는 모양새다.

4일 오전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담화문'을 읽기 위해 들어서는 모습. (연합뉴스)

그러면서 ‘측은지심을’을 유발한다. “스스로를 용서하기 어렵고 서글픈 마음까지 들어 밤잠을 이루기도 힘이 든다”, “무엇으로도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드리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하다”, “국민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해드리겠다는 각오로 노력해 왔는데 이렇게 정 반대의 결과를 낳게 되어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 “청와대에 들어온 이후 혹여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염려하여 가족 간의 교류마저 끊고 외롭게 지내왔다”, “홀로 살면서 챙겨야 할 여러 개인사들을 도와줄 사람조차 마땅치 않아서” 등의 표현이 동원된다. 마음 한켠에서는 정말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다. 일부 노년층에서는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반하장’이 숨어 있다. 도둑이 되레 막대기를 들려는 작태가 엿보인다. “더 큰 국정 혼란과 공백 상태를 막기 위해 진상 규명과 책임 추궁은 검찰에 맡기고 정부는 본연의 기능을 하루속히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향후 더 큰 혼란과 국정 공백은 야권의 책임이라는 식으로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난 계속 대통령 노릇 할테니 봐주라, 그렇지 않을 때 발생하는 일은 야당 책임이야’라고 부르대는 것이다. 이미 물 건너가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반푼이’ 김병준 씨한테 전권을 맡기겠다는 식의 얘기조차 꺼내지 않는다. 대통령으로 쭉 갈테니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음험한 냄새가 난다. ‘호시탐탐’의 역겨운 구린내다. 대통령은 “지금 우리 안보가 매우 큰 위기에 직면해 있다”, “국내외의 여러 현안이 산적해 있는 만큼 국정은 한시라도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잠시 뇌에 생각할 시간을 줘보자.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는 그동안 잘 굴러갔다고 한 국정이 엉망진창이었다는 것을 드러낸 사건이다. 그런 국정은 마비되어도 그리 별다른 지장은 없을 거라는 얘기다. 공무원들이 각자 자리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면 국정은 굴러가기 마련이다. 그러라고 공무원들한테 시민들이 월급 주는 거니깐 말이다.

기우이기를 바라지만 자꾸 걸린다. “지금 우리 안보가 매우 큰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대통령의 말이 가슴에 와서 꽂힌다. 언론보도를 보니, 지난 3일 새누리당 중앙위원회는 “패배의식에서 벗어나 정권 재창출보다 더 중요한 조국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하여, 더 나아가 빨갱이 나라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일치단결 하자”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한 모양이다. 둘을 결합시켜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군 최고통수권자로서의 대통령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는지 모른다. 북한과의 대규모 국지전을 지휘하는 대통령을 말이다. 호시탐탐 반전을 꾀하는 ‘되치기’의 달콤하고도 무서운 유혹이다. 하루라도 빨리 대통령을 직무정지 시켜야 하는 가장 큰 이유를 나는 여기서 찾는다. 더 큰 불행을 초래할 유혹의 싹은 빨리 잘라내는 게 좋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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