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제러미 벤담의 파놉티콘(panopticon·원형감옥)은 공간 기획을 넘어선 심리 기획이다. 감옥 둘레를 따라 둥근 원통 모양의 건물을 세운다. 내부를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감방이 층층이 배치된다. 감옥 한가운데에도 원통 모양의 감시탑이 세워진다. 간수 한 사람이 사방을 둘러보며 죄수 전원을 감시할 수 있으니 대단히 효율적이다. 하지만 진짜 효율은 ‘간수 숫자 대 죄수 숫자’ 비율로 산출되지 않는다. 죄수들은 간수가 감시탑에 있는지 없는지, 감시하는지 하지 않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러니 간수가 없어도, 혹은 그 안에서 고스톱을 치고 있어도 상관없다. 죄수들은 ‘자기검열’로 스스로를 통제한다. 이보다 효율적일 수는 없다.

1-2.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권력의 작동 기전이 파놉티콘이라고 갈파했다. 근대의 군대, 병원, 학교, 공장 등이 하나같이 최소한의 감시로 최대의 감시 효과를 누리는 공간적, 심리적 질서 안에 포섭돼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적 공간 자체가 거대한 감옥으로 환유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실제 감시를 받든 받지 않든 감시의 눈길을 내면화하고, 자기검열을 수행한다. 내면화한 자기검열은 정신의 영역으로 확장된 감시와 처벌이자, 일회적 징치보다 지속성이 강한 훈육이기도 하다. 감시당하는 자의 투명성과 감시하는 자의 불투명성, 그 비대칭성이 권력의 근원이다.

2-1.
검사는 방송구성작가의 7년치 이메일을 샅샅이 훑었다. 그 방대한 분량 가운데 서너 개의 문장만 골라 사회에 공표했다. 작가가 참여한 시사프로그램은 그 프로그램과 전혀 무관한 서너 개 문장과 만나,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하고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악의적 범의(犯意)의 결과물로 침전된다. 검사는 자신의 이메일로 7년 동안 몇 통의 사적 글을 주고받았고, 그 글 안에 몇 문장이나 삼엄한 법치와 배치되는 주관적 감정을 담아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니, 알 필요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된다. 그는 감시탑 꼭대기 보이지 않는 간유리 안에서 무얼 해도 괜찮다. 보여지는 것, 들춰지는 것은 오로지 작가의 것이다.

1-3.
사이버 세계가 만개하면서 푸코의 파놉티콘은 시놉티콘(synopticon)이라는 새 개념과 경합하게 된다. 파놉티콘이 ‘한꺼번에 아울러’(pan) 보는 것이라면 시놉티콘은 ‘서로 동시에’(syn) 보는 것이다. 권력이 대중을 일방적으로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권력을 역감시할 수도 있게 됐다. 그러나 시놉티콘의 낭만적 전망을 현실은 무참히 배반하고 있다. 대중은 개별적으로 권력을 감시하지만 권력은 집적된 대중 정보를 ‘한꺼번에 아울러’ 감시한다. 대중은 권력의 공적 행위만을 감시하지만, 권력은 대중의 사적 행위까지 감시한다. 이 과정에서 권력은 법은 물론 편법, 탈법까지 총동원한다. 전자화된 감시체계는 한층 고도화된 감옥이다.

▲ MBC 김은희 작가가 19일 “검찰이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사적 이메일을 공개했다”며 검찰 수사팀을 ‘비밀침해죄’와 ‘직무유기죄’로 고소했다. 19일 오후 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들이 검찰청 앞에서는 고소장 접수에 앞서 피켓을 들고 있다. ⓒ나난

2-2.
검사는 작가의 이메일 내용 일부를 왜 공개했을까? 작가를 욕보이거나 프로그램이 의도적이고 편향적으로 제작됐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목적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법정에서 증거자료로 제출해도 되는 것을 거센 반발이 충분히 예상되는데도 굳이 공개하고 나선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기소 단계에서 미리 ‘여론재판’을 거쳐 재판에서 우위에 서겠다는 계산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더 큰 노림수는 대중을 향해 경고 메시지를 날리는 데 있다. 10년치 이메일 정도는 내 손 안에 있다는, 딴짓 하고 있는 것 같아도 다 들여다보고 있다는, 그러니 알아서 자기검열을 철저히 하라는 메시지다.

1-4.
권력이 사적 영역을 들여다보거나, 들여다보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건 ‘관음적 권력감정’이 아니다. 공적 영역을 통제하기 위한 치밀한 기획이다. 공적 영역에서 권력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다가는 언제든 사적 영역이 까발려지는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는 경고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나누는 근대적 인식론에도 못 미치는 봉건적 행태라고 읽는 것도 오독이다. 권력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사적 영역을 감시해 공적 영역을 통제하는 기발하고 더없이 효율적인 권력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권력을 역감시하려거든 사생활을 철저히 없애야 한다. 시놉티콘 사회는 수도승만 모여 사는 사회여야 한다.

2-3.
사이버 시대 이전 시놉티콘의 고전적 주체는 언론이었다. 감시하는 권력을 역감시해온, 혹은 그렇게 신화화돼왔던 언론은, 그러나 어느날 권력에 포섭됐다. 대중은 이들 언론을 조중동이라고 부른다. 시민의 보편적 권리로서 ‘사생활 보호’와 ‘언론의 권력 감시/비판 기능’을 적극 옹호해야 할 이들은 오히려 사생활을 폭로하고,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다른 언론에 저주에 가까운 주술을 퍼붓고 있다. 이들에게 사생활 보호와 표현(언론/집회/결사)의 자유는 보편적 권리가 아니고, 이들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시민권은 권력과 자신들을 위해 복무하는 일부에게만 허용한다. 이들은 원형감옥 안의 완장 찬 죄수, ‘떡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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