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민하 기자] 비선 실세라는 최순실 씨가 검찰 조사를 받다가 긴급 체포됐다. 그러나 이 사태가 원활히 수습되고 국정이 정상화될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집권 여당이 무슨 말을 하든 국민은 더 이상 진의를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임기가 종료됐다는 얘기까지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국민은 검찰이 이 사건을 근본적 차원까지 파헤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지난 주말 께에 이 사건의 관련자들이 일제히 움직이면서 야권 일각으로부터 “컨트롤타워가 있다”는 비판이 이미 제기됐다. 언론들은 이 ‘컨트롤타워’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목하고 있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사태 직후 청와대에서 열린 간담회에 참석했을 뿐 아니라 최재경 신임 민정수석과도 가까운 사이라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1일 지면에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큰 그림을 그리고 새누리당 최경환 의원이 실무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박 대통령이 ‘비선(祕線)’ 논란으로 위기에 몰리면서 과거부터 의지해 온 공적 라인의 핵심이라 할 김 전 실장과 최 의원 역할이 커지고 있다”는 정치권 관계자의 언급을 전하고 있다.

지난 4월 총선에서 청와대 대변인 출신 민경욱 후보를 지지방문 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연합뉴스)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최경환 의원 등이 그린 그림이라면 그 내용은 두 번 볼 것도 없다. 최순실 씨와 안종범 전 수석, 정호성 전 비서관 등이 책임을 뒤집어 쓰고 박근혜 대통령에게 갈 피해는 최소화시키는 그림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후에도 최소한의 정치적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비박계가 아무리 요구를 해도 이정현 지도부의 사퇴는 안 된다.

이렇게 1차적 수습을 마무리한 이후에는 야권에 반격을 가해야 한다. 이 반격의 정체는 아마도 ‘종북’일 것이다. 보수논객으로 유명한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은 이날 조선일보 지면 칼럼에서 ‘송민순 회고록’ 문제를 두고 “이 스캔들이 신문·방송에선 '최순실 효과'로 덮이고 있지만, 대선 때는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를 것이다. 떠오르게 해야 한다”고 쓰고 있다. “‘최순실에게 물어보자’고 한 게 국기 문란 오십보(步)였다면 ‘북한에 물어보자’고 한 건 국기 문란 백보였다”는 억지도 빼놓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해서 빈사 상태에 빠진 박근혜 정권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사실상의 통치를 포기한 상태다. 박근혜 대통령은 터닝포인트가 된 대국민사과 이후 거의 아무런 일정을 잡지 않고 있다. 지난 27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자치박람회 개막식 참석 정도가 거의 유일한 외부일정인데, 얼마나 정치적 충격이 컸던지 행사장의 텅 빈 의자들이 화제가 될 정도였다. 이 일정 이후 재래시장 방문 등의 추가 일정이 있었지만 전격 취소됐다는 뒷 얘기가 나올 정도이다. 핵심 수석비서관들이 모두 그만뒀기 때문에 31일 수석비서관회의는 열리지 못했고 1일 국무회의 역시 황교안 국무총리가 주재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치 포기’ 사태는 국회 운영에도 지장을 주고 있다. 2일 대통령 비서실의 내년도 예산안 심의를 위한 국회 운영위 전체회의가 예정돼있으나 보고할 사람이 없어 문제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이다. 원칙대로라면 대통령 비서실장이 출석해야 하나 사퇴하고 없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없다면 서열에 따라 나올 사람을 따져야 하는데 선임 수석비서관인 정책조정수석도 없고 그 다음 순위인 정무수석도 없다. 다음 순위인 민정수석은 국회 출석을 하지 않는 게 관례이고 그 다음은 배성례 신임 홍보수석인데 엊그제 임명된 사람이 국회에 출석해서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굳이 서열을 따지지 않더라도 남아있는 수석비서관 중에 국회에 출석해 예산에 대한 보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

그래서 언론은 이르면 1일, 아무리 늦어도 이번 주 안에 박근혜 대통령이 비서실장을 임명할 거라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거론되는 인사들은 2012년 대선 당시 캠프 종합상황실장을 지낸 권영세 전 주중대사,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 현경대 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등이다. 여기에 학계 출신으로 분류되는 이장무 전 서울대 총장, 정갑영 전 연세대 총장 역시 거론되고 있으며 충청권 안배를 고려한다면 심대평 지방자치위원장 역시 고려해볼만 하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그런데 누굴 임명하든 당장의 국회 운영위 문제는 해결할 수 있겠으나 과연 박근혜 대통령이 통치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냐에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만일 대통령 비서실장을 새로 임명한다면 세 가지 스타일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첫째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 같은 통치대리형, 둘째는 이원종 전 비서실장 같은 관리형, 셋째는 대통령의 뜻과 관계없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소신형이다. 그런데 세 번째 선택지는 이 정권의 특성을 볼 때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비박계 인사를 불러다 앉히는 것 밖에는 답이 없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가 자기 코 앞까지 들이닥치는 걸 용인할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결국 새로운 대통령 비서실장은 김기춘 스타일이거나 이원종 스타일이다. 온갖 모략으로 국민들에게 고통을 가중시킬 사람이거나 권력의 심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파악도 못하고 비선에 휘둘리는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란 얘기다. 박근혜 정권의 통치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1차적 수습 이후에도 지속되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데 당장 대통령 비서실장 선임 문제만 봐도 그러리라는 기대를 전혀 할 수가 없다.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권영세 전 주중대사만 봐도 당장 2012년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는 지적을 피할 수가 없다. 즉, 박근혜 정권이 유지되려면 ‘나쁜 실권자’가 전면에 등장하거나 ‘허수아비와 제2의 비선’이 등장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1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주한대사 신임장 제정식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거국중립내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새누리당이 주장하는 거국중립내각과 야권이 주장하는 거국중립내각이 다른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대통령이 직을 유지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통령이 직을 유지하는 한, 그의 권력은 죽은 것 같아도 마지막까지 ‘살아있는 권력’이다. 대한민국의 헌법과 관계 법령이 규정하는 대통령의 권력은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한 어떤 방식으로도 제한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거국중립내각이란 결국 대통령을 그만두게 할 수 없으니 말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눈 가리고 아웅’이다.

그러나 거국중립내각에 대한 정치적 합의는 새누리당의 정권재창출과 관련한 시나리오가 분명해지는 것에 반비례해 형해화 될 가능성이 크다. 새누리당 내 비주류 대권주자들끼리의 ‘혁신경쟁’은 박근혜 정권을 탄생시킨 책임을 희석시킬 것이다. 당장 1일 오후 김무성, 오세훈, 남경필, 원희룡 등 비박계 차기 대권주자들이 긴급 회동을 갖는다는 소식이다. 이들은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의 사퇴와 비대위 구성 등을 요구할 것으로 추측되는데 결국 포장을 잘 바꿔서 다시 한 번 자신들을 중심으로 한 정권재창출에 나서겠다는 얘기다.

정치적으로 바람직한 유일한 선택은 박근혜 대통령이 하야를 선택하고 빠른 시간 안에 새로운 정권을 구성하는 길 밖에 없다.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는 31일 정세균 국회의장이 주재한 3당원내대표 모임에서 “하야 탄핵 정국을 만들겠다는 거냐”며 야권의 태도를 비판했다. 그러나 그런 질문은 거꾸로 정진석 원내대표가 받아야 한다. 하야 탄핵 정국이 되면 왜 안 되는가? 박근혜 대통령이 헌정을 거부하였음에도 대통령직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새누리당은 이런 불법한 정권을 지지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이 ‘그렇다’는 것이면 야권은 탄핵소추안 발의를 무릅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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