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당혹스러운 이야기를 들었다. 이러다가 박근혜 대통령이 변고라도 당하면 어찌하느냐는 것이다. 이 말은 박근혜 대통령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그의 ‘콘크리트 지지층’이 아니라 야권 지지자의 입으로부터 나왔다. 말인즉슨, 박근혜 대통령이 위험한 지경에 처하면 보수층이 결집하고, 이게 결국 2017년 대선에서 야권에는 패인으로 작용하지 않겠느냐는 거다. 흔치 않은 하나의 사례로 여기고 말 일을 굳이 글자로 옮겨 적는 것은, 양태는 다를지라도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정서가 야권 일반에 자리잡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의당은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행동에 돌입한다고 한다. 이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 국회 정론관에 나타난 심상정 대표는 더불어민주당이나 국민의당이 특검 실시 정도로 사태를 관리하려 한다는 점을 비판하며 “헌정유린 사태의 공범과 무슨 협상을 한다는 것인가”라고 반발했다. 특검 실시를 위해서는 반드시 새누리당과 합의해야 한다는 사실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호명된 더불어민주당은 서둘러 선을 그었다. 28일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는 정의당과 하야, 탄핵 주장을 함께 할 생각이 없다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하야를 하게 되면 90일 안에 대통령 선거를 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더 큰 혼란이 야기돼 경제가 어려워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혼란이 야기된다”, “경제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어디에 붙여도 되는 ‘만능 주장’이다. 실제 박근혜 대통령이 정상적(?)으로 활동을 할 때에도 혼란은 계속 야기됐고 경제 역시 계속 어려워졌다. 우상호 원내대표가 굳이 혼란과 경제를 언급하는 것은 하야를 요구하거나 탄핵을 추진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기로 이미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현실적 판단이 작용했으리라 본다. 국회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추진하는 것은 겉보기엔 시원해보이겠으나 실속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 탄핵안을 처리하는 데에는 새누리당 일각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탄핵안이 처리된다고 해도 과거 참여정부의 사례에서 보듯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기다려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이 기간 동안 박근혜 정권이 그들의 특기 중 하나인 정치공작을 통해 상황을 정리하면 박근혜 대통령이 다시 ‘부활’할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

실제 세계일보의 최순실 씨 인터뷰는 이런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최순실 씨는 이 인터뷰를 통해 분명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JTBC가 보도한 태블릿PC는 자신의 소유가 아니고 국정개입은 연설문 등의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만 이루어졌다는 거다. 만약 지금과 같은 규모의 민심이반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였다면 유능한 정치기술자들은 분명히 유사한 방식으로 사태를 정리했을 것이다. 태블릿PC는 최순실 씨의 측근인 고영태 씨가 개인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최순실 씨나 박근혜 대통령과는 관계가 없고, 최순실 씨가 재단 운영과 관련해 횡령 등을 한 것에 대해선 수사할 수 있으나 국정개입에 대해선 처벌할 수 없고, 박근혜 대통령의 잘못에 대해선 형사소추가 금지돼있으므로 어쩔 수 없다는 식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새누리당과의 특검 도입 협상을 중단한 것도 이런 맥락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최순실 부역자’들의 일괄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이나 안종범 정책조정수석과 같은 직접적 연루자들이 사실상 이 협상의 ‘플레이어’로 뛰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사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의 태도 역시 특검 협상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새누리당은 리크스를 최소화해 이 상황을 관리하길 원하지 헌법을 배신한 대통령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민사회단체 회원과 시민들이 27일 오후 서울 광화문역 인근에서 최씨(왼쪽)와 박 대통령의 가면을 쓴 채 정권 규탄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현실 판단’ 이상의 정서가 야권 지지자들 일반의 태도에서 감지된다는 측면도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역풍’에 대한 우려다. 대통령에 대한 섣부른 탄핵 주장이 어떤 정치적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이미 노무현 정권의 사례로부터 드러났다. 탄핵 역풍으로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은 순식간에 국회에서 제1당이 됐다. 마찬가지의 원리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현실화되면 지금은 그를 버린 것과 같은 상태인 보수층이 다시 결집해 ‘콘크리트 지지층’을 형성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이제 박근혜 정권은 불법한 존재가 됐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이유는 권력을 국민이 위임하였기 때문이다. 이의 근거는 헌법이 담고 있는 가치와 그것이 규정하는 절차이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권력을 최순실 씨에게 위임한 것은 헌법 상의 어떤 근거도 없다. 오히려 박근혜 대통령이 자의로 권력을 남에게 위임한 것은 그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위임됐다는 사실을 부정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지금 드러나는 사실로 볼 때 실제로 지난 4년간 박근혜 정권이 이런 식으로 운용돼왔다는 것은 진실에 가깝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이 정권을 지속할 이유도 근거도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28일 언론 지상 곳곳에는 과거 러시아의 요승으로 국정을 쥐고 흔들었던 라스푸틴이 등장했다. 최태민 일가가 국정에 개입한 이야기가 과거 라스푸틴의 사례와 흡사하다는 거다. 라스푸틴의 전횡은 전제왕정을 끝내려는 혁명가들에게 명분을 줬고 결국 로마노프 왕조는 왕정을 거부하는 모든 ‘주의자’들의 연합전선에 밀려 무너져 내렸다. 이 시기를 통해 국민이 직접 통치권을 행사하는 소비에트 권력이 확대됐고, 이게 다시 사회주의 혁명의 기초가 됐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은 레닌과 볼셰비키가 비타협적 투쟁을 통해 혁명의 주인공이 됐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1917년 2월부터 10월에 이르기까지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대중 속으로 들어가 집권을 위한 실질적 준비를 시작했고,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한 최적의 조건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새삼스럽게 러시아 혁명사를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제1야당과 그 지지자들이 걱정하는 ‘역풍’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다. 정치공학적으로 보면 그 역풍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없는 게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야 요구, 탄핵 추진, 특검 요구 관철 등 수많은 옵션 중에 무엇을 선택할지, 또는 어느 날짜에 어떤 방식으로 탄핵소추안을 발의할 것인지의 문제가 아니다. 권력의 근거가 뿌리째 흔들리는 이 시기에 대안적 정치세력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국민들 속으로 직접 들어가야 한다. 국민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이를 현실정치로 어떻게 외화할 것인가의 고민을 끝없이 반복해야 한다.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국민의 요구와는 전혀 관계없이 국회 내에서의 이합집산의 결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대다수의 국민들이 박근혜 정권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국면이다. 정치에 하등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선 정치가 이들의 요구를 대리하는 게 아니라 이런 사람들의 요구와 의도가 정치 그 자체로 전화되어야 한다. 즉, 지금 국면은 우리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민주공화정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체감할 수 있도록 기성 정치가 문을 활짝 열어야만 하는 시기다.

러시아 혁명사에 등장하는 재미있는 표현 중의 하나는 “술잔에 술이 가득차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자연히 알게 된다”는 것이다. 술잔에 술이 찼으면 마셔야 한다. 지금 드러난 사실들이 가리키는 것은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권이 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단 하루도 지속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야권이 이러한 점, 즉 민주공화정의 가치에 동의한다면 역풍 우려에 전전긍긍할 이유가 없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