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전체가 각자의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시민들도 나름의 고민에 빠졌다. 권력 창출 시기를 1년여 앞두고 대통령이 순실이의 꼭두각시였음이 시나브로 확인되는 사건이 온 나라를 그렇게 만들어버렸다. 모두가 얘기하듯이 국정의 총책임자인 대통령은 이미 정치적 식물인간이 돼 버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차원을 떠나, 대통령의 어떤 말도 더 이상 시민들에겐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이 아니다. 국정을 수행할 최소한의 근거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여기가 출발점이다. 시민이나 정치권이나 마찬가지다. 이 출발점에서 모든 것을 평가해야 한다. 정치에서 손을 떼고 외교와 국방 등에 전념하라는 식의 주장은 그래서 말이 안 된다. 대통령은 이미 국제적 조롱거리로 전락했고, 아주 만만한 협상 상대방으로 낙인찍혔다. 이른바 ‘국익’이라는 걸 제대로 지켜내기 어렵게 됐다는 뜻이다. 그러니 내년 12월까지 정치적 식물인간인 대통령을 끌고 가는 건 선택지가 아닌 듯하다. 가급적 이른 시일 안에 대통령이 아니게 만들든지, 대통령 직무정지를 시키든지 하는 필요성이 생긴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오른쪽 두 번째)가 28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추 대표는 이날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의 사퇴 등 3대 선결 요건을 내세워 '최순실 특검' 협상 중단을 선언했다.(연합뉴스)

여기가 분기점이다. 내년 12월 새로운 권력창출을 앞둔 상태에서 정치권 각자가 떠올리는 해법은 제 각각이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으로서는 어떻게든 시간을 벌면서 공멸의 위기를 벗어나는 게 최우선의 관심사다. 그래야 권력창출 경쟁에 뛰어들 수 있는 기반을 유지할 수 있다.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특검’이다. 이미 더민주와의 협상에서 대통령이 수사대상이니 아니니 하는 줄다리기 속에서 그런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 패권을 장악한 친박의 아성이 무너지지 않는 한, 응당 나와야 할 대통령의 출당이나 탈당은 발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시간 벌기라는 측면에서 새누리당 전체에게 최악은 대통령의 ‘하야’다. 물러나는 순간 대통령선거를 곧바로 치러야 한다. 생각하기도 싫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참패할 게 불 보듯 뻔해서다. 대통령도, 아니 순실이도 이걸 알고 있고 청와대 참모들도 알고 있다. 그러니 하야를 원하는 시민들이 유권자의 50%를 훌쩍 웃돌지 않는 한 현 정권이 하야 압력에 굴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게 권력의 속성이다. 하물며, 대통령에게 하야는 그토록 복권하고 싶던 아버지까지 자신과 함께 한 번 더 몰락하게 하는 상징일 테니 끝까지 거부할 가능성이 높다.

더민주는 ‘탄핵은 하지 않겠다’고 일찌감치 선을 그었다. 대신에 선택한 카드는 ‘특검’이다. 다만, 형사소추는 아니더라도 대통령이 수사는 받아야 한다거나 특별검사를 국회가 추천하거나 하는 조건을 내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새누리당과 협상이 시작됐고 난항은 불가피하다. 그러다 차일피일 시간이 갈 경우 더민주로서는 최후의 통첩을 하면서 양보를 끌어내려고 하려는 듯하다. 새누리당이 시간을 끌면 끌수록 권력창출 경쟁에서 더민주에 그리 나쁘지 않다는 계산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권력창출 경쟁에서 시간 끌기가 야권에 유리하게 작용할지는 잘 모르겠다. 현 정권은 여전히 시퍼렇게 새누리당 정권이다. 쏟아지는 언론의 소나기 비판에서 벗어나면서 할 만큼 했다는 정도의 인상을 주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다. 이미 최순실 개인의 일탈로 몰기 위한 움직임이 가동되기 시작했고, ‘순실이 숨바꼭질’ 게임 속에서 수사는 기약 없이 늦춰질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다. 순실이 상왕 사건이야말로 개헌의 필요성을 높였다는 기가 찰 발상까지 친박에서 내놓고 있다. “순실이를 반드시 데려오겠다”는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말에 얼마나 무게가 실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법무부와 검찰이 그의 말대로 움직이는 건 아니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더민주의 유력한 대선 후보인 문재인 전 대표가 대통령에게 탈당과 거국중립내각 구성을 요구했다. 탄핵까지는 가지 않겠다는 것까지는 당과 공유하면서도 거국중립내각(내각 총사퇴)으로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다. 우려되는 국정 공백을 메워보자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새 총리의 임명과 내각의 구성 역시 대통령의 권한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거국중립내각 구성에서 핵심적인 역할은 국회가 맡아야 한다는 함의가 전제된 제안일 것이다. 더민주와 새누리가 이미 벌이는 특검 협상보다 더 심각한 난항이 불가피해 보인다.

국민의당은 특검이 정쟁의 대상으로 빠질 것을 우려하면서도 아직 구체적인 제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정의당은 일찌감치 하야로 가닥을 잡았다. 하야에 대한 나의 의견은 앞서 밝힌 것과 같다. 특검이나 거국중립내각 역시 정쟁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될 위험성이 높다. 내 생각은 간단하다. 지금 당장 대통령의 직무정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수단은 현재로선 탄핵밖에는 없다. 여기에 따르는 조기 대통령선거는 감당하면 된다. 식물 대통령을 내년 12월까지 끌고 가느니 이게 더 나라를 위해 좋은 일 아닌가 싶다. 이런 가능성과 사나리오를 배제하는 것 자체가 사태의 장본인들이 다른 마음을 먹게 할 가능성은 없는지 따져봐야 한다. 권력의 나쁜 속성이 틈을 볼 가능성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라의 꼴을 제대로 갖추려면 그에 걸맞은 가혹한 절차와 아픔이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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