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보며 “대한민국은 망했다”라는 말을 사석에서 자주 하게 되었다. ‘망했다’는 것은 물론 비유에 가까운 표현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된 걸로 쳐도 무리가 없는 것 같다. 나라를 다스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나라를 다스릴 생각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는 사람들이 권력을 틀어쥐고 사유화했다. 더 실망스러운 것은 이 사태에 대처하는 집권세력의 태도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는 대한민국 정치를 망하게 하고 있다. 냉소주의는 신실한 정치의 적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가장 큰 문제는 이 사건이 다수 대중의 냉소적 현실인식을 ‘진실’로써 추인한다는 거다. 냉소주의적 현실인식의 기본형은 ‘정치란 겉으로는 명분을 말하면서 뒤로는 사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정치적 행위를 제대로 논평하는 일은 이러한 냉소주의적 현실인식을 거스를 때에만 가능하다.

예를 들면, 대통령이 체육계에 대한 전반적 비리를 조사하도록 지시한 상황을 가정해보자. 대중의 냉소적 현실인식에서 이는 대통령이라는 정치인이 체육계를 압박해 자신이 원하는 어떤 사적 관계에서의 이득을 받아내기 위한 행위다. 그러나 정치적 행위에 대한 논평, 즉 정치평론은 이제까지 정권의 통치 맥락을 따져 이 지시가 촉발할 정치적 효과를 점검하고 그간 체육계에 얼마나 많은 부조리한 일이 있었는지를 논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런데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뒷받침하는 것은 정치평론이란 결국 그저 허무한 일에 불과하고 대중의 냉소주의적 현실인식이 진리에 보다 가깝다는 점이다. 최순실 씨 딸 승마선수 정유라 씨의 사적이익을 위해 대통령의 권력이 동원됐다는 게 언론에 등장한 다수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체육계 비리 같은 것은 하나 마나한 얘기가 된다.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일이 아닌가.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왼쪽)과 안종범 정책조정수석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씨의 국정개입을 사실상 인정하는 사과를 한 이후 집권여당과 청와대는 수습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언론은 청와대의 수석비서관들이 일괄사퇴를 논의하였으나 우병우 민정수석과 안종범 정책조정수석이 이에 반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는 보도를 연이어 내놓고 있다. 일괄 사퇴를 반대하였다는 두 사람의 논리는 대통령이 어려울 때 청와대를 떠나는 건 무책임한 배신행위라는 걸로 요약할 수 있다.

만일 우병우, 안종범 수석이 자기 일을 제대로 충실히 하고 있었다면 이런 주장도 일리가 있는 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그런데 이들이 하는 일이 오히려 문제를 심각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우병우 민정수석은 그들의 관점에서 사태가 최순실 국정농단까지 오도록 한 장본인이다. 애초에 대통령 측근과 친인척 관리 자체가 민정수석의 소관 업무다. 그런데 이런 임무를 제대로 챙기긴 커녕 몇 달째 사퇴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데도 직을 내놓길 거부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결국 ‘일괄사퇴는 안 된다’는 주장은 ‘내가 물러날 수 없다’는 것에 가까우리라 예상할 수밖에 없다.

이제 사람들은 ‘팔선녀’를 언급하고 있다. ‘팔선녀’란 최순실 씨를 도와 국정에 개입하고 권력을 사유화 한 여덟 명의 여성들을 일컫는 것으로 ‘국내 굴지의 대기업 오너들과 오너의 부인, 현직 고위 관료의 부인, 전직 금융계 인사의 부인, 사정기관 핵심 인사의 부인 등’으로 이뤄져 있다고 하는 게 일반적 평가이다. 언론은 여기에 우병우 민정수석의 부인이 포함돼있다는 주장이 나온다고 보도하고 있다. 결국 우병우 민정수석이 버티는 건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 행위의 연장선상으로 비춰질 개연성이 충분한 것이다.

안종범 정책조정수석은 교수 출신임에도 대통령이 가장 신임하는 수석비서관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대개 교수 출신의 수석비서관이나 장관들은 관료들이 형성해 놓은 기성 질서에 밀려 파열음을 내거나 허수아비가 되는 경우가 많다. 최근의 사례를 들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고들 하는 유일호 경제부총리의 경우다. 유일호 부총리는 한국개발연구원 출신으로 정계에 입문한 케이스로 취임 때도 관료 경험이 없는 게 우려가 된다는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다. 현재 강석훈 청와대 경제수석도 교수 출신으로 정계에 입문해 수석비서관이 된 사례인데 존재감이 없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안종범 정책조정수석이 이 정부의 ‘실세’로 불리는 것에 의문이 제기됐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통해 그 이유가 명명백백히 밝혀졌다. 최순실 씨의 요구에 따라 미르·K스포츠재단 등의 출연금을 모으기 위해 대기업을 직접 압박하는 등 ‘비선실세’에 대한 남다른 충성심을 과시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업무 전문성에 있어선 평가가 박한 모양이다. 한겨레 지면에 실린 김의겸 기자의 글에는 “세종시 공무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안 수석은 존재감이 없단다. 경제부처의 국장, 과장들이 대면 보고를 가면 큰 그림은 그려주지 않고 조그만 트집을 잡아서 혼내기만 했다고 한다”고 써있다. 이런 사람이 수석비서관 일괄사퇴를 거부하니 이것 역시 최순실 씨 국정농단 행위의 연장선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이들이 이러는 동안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수행지지도는 급전직하하고 있다. 리얼미터가 24일부터 26일까지 3일간 전국 19세 이상 유권자 1528명을 대상으로 전화면접과 스마트폰 앱, 자동응답 혼용방식을 통해 조사한 결과(응답률 10.4%,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서 ±2.5%포인트)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수행지지도는 21.2%를 기록했다. 하루 단위의 변화를 보면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24일 28.7%였던 지지율이 25일 22.7%, 26일 17.5%로 그야말로 급전직하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를 논하는 사람으로서는 간담이 서늘해진다. 이 ‘급전직하’의 수치에 단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반대만이 반영돼있는 게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정치적 냉소의 확대이다. 정치적 냉소의 확대는 단기간 야권에 정치공학적 이익을 안길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정치 전체에 강한 트라우마를 남길 것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때문에 대한민국 정치는 망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리얼미터 이택수 대표는 CBS라디오에 출연해 이와 같은 내용의 여론조사 결과를 전하면서 “과거 김영삼 전 대통령이 5년차 때 한 자릿수를 기록한 적이 있었다. 5년차 4분기 때 한국갤럽 조사에서 6%를 기록했었는데 지금 YS정권 마지막 해의 지지율과 비슷한 곡선을 보이고 있다”고 발언했다. 그렇게 따지면 과연 새누리당의 기반을 이루는 세력은 대한민국을 1997년엔 경제를, 2016년엔 정치를 각각 두 번에 걸쳐 망하게 만든 셈이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오른쪽)와 정진석 원내대표가 27일 오전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굳은 표정으로 얘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새누리당이 리스크를 최소화 하면서 청와대를 방어하기 위해 자중지란에 빠진 모습을 보여 과연 이 나라 보수세력이 나라를 다스릴 자격이 있는지 의심한다. 자기도 연설문 쓸 때 친구 도움을 받는다는 소리나 하는 이정현 대표의 사퇴와 비상대책위원회 구성은 상식적 조치다. 그런데 당 지도부는 이 상식적 조치마저도 거부하고 있다. 즉, 새누리당은 최순실 씨 문제를 다 알면서 박근혜 대통령을 배출했고, 예상됐던 그 문제가 실제로 벌어졌는데도 속수무책인 백해무익한 정치세력이 됐다. 더 이상 존재 이유가 없다.

최소한의 신의성실한 정치를 가능케 하기 위해 청와대와 새누리당에서 그나마 상식적 차원의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 이탈해야 한다. 조선일보는 27일 사설에서 친박이라는 정치세력의 문을 닫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진석 원내대표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으나 대안도 없이 물러날 순 없지 않겠느냐고 한다. 스스로 문을 닫지 않겠다면 다른 이들이 닫게 만들어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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