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오랜만에 ‘현안’에 대한 입장을 내놓았다. 주요 언론들은 마치 ‘가이드라인’이라도 받은 듯 ‘정면돌파’란 단어를 써서 이를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을 ‘정면돌파’로 볼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상당히 방어적인 자세를 취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애초 17일로 예정됐던 수석비서관회의가 20일로 연기됐을 때 주요 언론은 두 가지 메시지가 포함될 수 있을 걸로 예상했다. 첫 번째는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의 거취에 관한 문제다. 두 번째는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 문제다. 박근혜 대통령은 우병우 민정수석 거취에 대해선 따로 언급하지 않았고 대북 강경 발언을 내놓긴 했으나 송민순 전 장관 회고록에 대한 직접적 언급도 하지 않았다.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 문제에 대한 발언은 지금까지 정부 여당 관계자들이 내놓은 것과 큰 차이가 없는 내용이다. 대통령이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의 기치를 내걸고 두 개념의 융복합 필요성을 설파하고 다녔더니 대기업이 알아서 돈을 모아 재단을 만들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재단들이 개입한 사업은 세계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이에 대한 무책임한 의혹 제기는 기업들의 투자 의욕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도 했다. 설립 과정에서의 문제는 바로잡으면 된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좀 문제가 있을 순 있으나 퇴임 이후 구상 같은 건 아니고. 나는 잘 하고 있으니 신경 끄고 너희들 할 일이나 하라’는 얘기다.

유일하게 그나마 ‘돌파’로 볼 수 있는 것은 최순실 씨에 대한 사실상의 수사 지시를 한 부분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느 누구라도 재단과 관련해서 자금 유용 등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면 엄정히 처벌받을 것”이라고 발언했다. 대통령의 말에 응답을 하듯 최순실 씨의 통화기록 조회 등에 돌입한 검찰은 21일 미르·K스포츠재단 수사팀에 5명의 검사 인력을 보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과연 이 수사가 제대로 될 것인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이 제기된다. 애초에 검찰이 의지를 가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검찰은 시민단체가 고발한 미르·K스포츠재단 사건을 형사부에 배당했는데, 애초 담당검사는 1명에 불과했다. 특수부 경력은 없으며 ‘막내급’이라고들 했다. 이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자 검찰은 또 못 이기는 척 검사 1명을 더 붙여줬다. 이게 박근혜 대통령 발언이 나오기 이전까지 이 사건에 대해 검찰이 한 일의 전부다.

박근혜 대통령이 20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결국 대통령이 ‘재가’를 하기 전까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가 상세한 ‘가이드라인’이 주어지고 나서야 검찰이 움직이는 그림인 셈이다. 대통령이 표면적으로 내세운 가이드라인이 충실히 적용된다면 미르·K스포츠재단의 실질적 내용은 존속될 것이고 다만 최순실 씨의 ‘개인 비리’ 부분에만 법적 조치가 취해질 것이다. 당연히 이 정도의 결론으로는 국민적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결론조차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최대한의 호의적 해석으로만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수사기관과 정보기관을 사실상 한 손에 쥐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우병우 민정수석의 위세는 아직도 하늘을 찌를 듯하다. 국회의 출석요구는 ‘바쁘다’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내용의 ‘불출석사유서’에 의해 묵살되었다. 우병우 민정수석과 관련한 비리를 수사하는 검찰이 우병우 수석에게 지휘를 받고 우병우 수석에게 그 결과를 보고한다는 ‘셀프수사’ 의혹 역시 해소된 일이 없다. 결국 최순실 씨나 이상한 두 재단 수사도 청와대의 의도대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검찰은 왜 이리 소극적인가. 참여정부 시기에는 시작부터 평검사가 대통령에게 대들었고, 이명박 정권 말기에도 ‘검란’이라 불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박근혜 정권이 수사기관을 대하고 활용해온 과정을 보면 이미 ‘검란 시즌 2’가 일어났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태다. ‘검찰은 검찰의 편’이라고 하니 박근혜 정권 말기에 기어코 검찰이 들고 일어나리라는 예측을 해볼 수도 있다. 그런데, 예측이 현실이 될 것인가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검찰이 청와대에 이렇게까지 꼼짝 못하는 게 과연 우병우 수석 혼자만의 힘일까 의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대통령이다. 검찰조직의 입장을 헤아려 보면 알 수 있다. 정권에 잘 보이는 사람은 승진하고 그런 마음 없이 자기 일 열심히 한 사람은 비상식적 수단이 동원돼더라도 반드시 찍혀 나가게 된다는 걸 이미 모두가 보았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을 최선을 다해 수사하려 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그랬고, 윤석열 검사가 그랬다. 반대로 권력의 핵심과 친한 인사는 돈도 벌고 승진도 했다. 이른바 ‘우병우 사단’이 그렇고 진경준 전 검사장이 그렇다. ‘각자도생’이 체화된 상태에서 최소한의 공적 사명감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범죄를 밝혀내고 죄를 묻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

조직적 위기감도 있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도입 여론에 특별감찰관제 도입으로 응수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거치면서 특별감찰관제가 유명무실하다는 게 드러났다. 거기다 여소야대 국면인 상황에선 박근혜 대통령이 최소한의 인사권을 갖는 형태의 공수처가 결국 도입될 수도 있다. 그러면 검찰의 기소독점은 깨진다. 검찰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시나리오다. 우병우 수석의 존재는 검사동일체원칙의 훼손을 불러오고 있다. 검사동일체원칙은 명문화된 형태로는 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검찰 조직을 움직이는 하나의 원리다. 기소독점과 검사동일체원칙이 없으면 검찰의 힘은 상당 부분 축소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경찰이 수사권 독립 요구까지 얹는다면 그야말로 악몽이다.

이게 이 정권의 가장 악랄한 점이다. 검찰조차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 약육강식과 각자도생을 시대의 원리로 만들어버린다. 권력은 국민의 생명을 구할 생각이 없고,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의지도 없다. 공식적인 직책이라는 건 그저 허수아비일 뿐이다. 이 시점에서 ‘시스템’은 그냥 ‘있어야 하니까 있는 것’이 된다. 공적 체계가 아니라 대통령과의 거리에 의해 서열이 정해지는 전근대적 질서가 권력의 원리다. 그러나 결국 최순실 씨가 감옥에 갇히고 말 것이라는 주장을 누구도 자신있게 내놓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시대를 모두가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가. 이런 체제가 계속 유지될 수는 없다. 변화는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도 시작되기 마련이다. 최순실 씨에 대한 성역 없는 수사와 처벌은 검찰이 자신들의 굴욕을 끝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법치’란 ‘불법폭력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필요한 말이 아니라, 법을 어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는다는 ‘시스템’의 존재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 중요한 일을 방기하면 역사의 죄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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