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기사를 읽다 보면 위기감이 느껴지는 때가 많다. 최근에는 그 빈도가 확실히 늘었다. 경제 관료들이 위기론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꼭 하는 말이 있다. 예견된 위기는 위기가 아니라는 거다. 이 얘기는 반 정도 맞는 얘기다. ‘예견된 위기는 위기가 아니다’라는 말의 의미는 ‘위기를 예견하면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다’는 거다. 그러나 위기가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에서 오히려 정부가 대응책이 없다는 확신을 주고 있어 걱정된다.

최근의 위험신호는 IMF 세계은행 연차총회 참석 관계로 미국에 간 유일호 경제부총리와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벌이는 입씨름이다. 발단은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가 한국, 독일, 캐나다를 콕 찝어 재정여력이 있기 때문에 경기부양에 나서야 한다는 발언을 직접 한 데서 시작됐다.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이에 대해 현지시간 8일 블룸버그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기준금리가 아직 1.25%라며 아직 금리인하 여력이 있다고 발언했다. 즉, 재정정책보다는 통화정책을 수단으로 한 부양에 나서겠다는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문제는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이제 정면으로 맞서면서 시작됐다. 같은 날 이주열 총재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국내 통화정책은 이미 충분히 완화적이고 통화정책을 쓸 수 있는 여력이 제한적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여기까지였다면 확전은 피할 수 있었겠으나 이주열 총재는 한 발 더 나갔다. “한국의 재정건전성은 세계적으로 톱클래스”라면서 “재정 정책은 여력이 있다고 본다”고 주장한 것이다.

적정금리를 내부적으로 산출하는 시스템을 가진 한국은행 입장에서는 현재 기준금리 1.25% 수준을 두고 경제부처 수장이 “금리인하 여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때 2% 수준의 금리를 가지고도 한국은행은 ‘전시금리’라고 불렀다. 현재 1.25%는 한국은행 입장에선 그야말로 ‘가보지 않은 길’이다.

이런 사정을 뻔히 아는 유일호 부총리지만 그렇다고 내놓은 발언을 거둬들일 수도 없는 일이다. 10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유일호 부총리는 추경에 이어 본예산도 확장적으로 편성했고 10조원 규모의 재정보강도 발표했다고 주장하며 현재 쓸 수 있는 재정정책을 모두 동원하고 있다고 발언했다. 경기부양은 필요한데 재정정책을 이미 다 썼다면 남는 것은 통화정책 밖에 없다. 한국은행이 넘긴 공을 다시 되돌려 준 셈이다.

유일호 경제부총리(왼쪽)와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연합뉴스)

그저 해프닝으로 볼 수도 있는 문제이나 이게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건 정권 말기의 정책적 무책임이 논란의 배후에 감지되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정부 정책에 대해 반기를 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가깝게는 지난 8·25 가계부채 대책 발표를 전후해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상대는 가계부채 관리의 직접적 책임 주체 중의 하나인 금융위원회였다.

당시 한국은행의 주장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정부 정책에 발맞추기 위해 무리를 해서 금리를 인하했는데, 당연히 우려됐던 가계부채 문제의 확대에 대해 정부가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거다. 이에 대해 금융위는 올해 초 여신심사가이드라인 시행을 예로 들며 가계부채 대책이 충분하진 않지만 잘 작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선임부처인 기획재정부가 티격태격하는 한국은행과 금융위원회의 중재를 섰으나 사실상 그 결과로 발표된 8·25 대책이 가계부채 문제 해결에 과연 도움이 됐는지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그야말로 ‘부정적’이다.

오히려 8·25 대책은 가계부채 대책이 아니라 부동산 대책으로 둔갑해 있는 상황이다. 이 문제를 다루려면 ‘초이노믹스’의 최경환 부총리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최경환 부총리는 부동산 규제 완화를 동력으로 한 내수경기활성화를 시도하였다. 기업의 현금이 가계로 흘러 들어가도록 하겠다며 기업소득환류세제를 시행하기도 했다. 한국은행의 금리인하 행진이 이어지는 도화선이 된 “척하면 척”이란 발언이 이 때 나왔다.

그러나 ‘초이노믹스’는 ‘코리아그랜드세일’이나 대체휴일 등을 통한 억지 내수경기 활성화와 부동산 담보 대출 증가로 인한 가계부채 총량 증가라는 파탄적 성적표를 남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뒤늦게 한국은행이 의문을 표해도 정부는 공을 다시 돌려줄 뿐이다. 정부가 강하게 주장한 ‘폴리시 믹스’를 해봤자 결국 비난의 화살은 한국은행으로 돌아온다는 학습효과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4·13 총선 당시 새누리당이 주장했던 ‘한국형 양적완화’도 마찬가지다. 여러 사람들이 지적했듯 이 정책은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양적완화’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없다. 이 주장의 핵심은 공급과잉 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에 필요한 재정을 한국은행의 발권력으로 메꾸자는 거다. 당연히 한국은행으로서는 펄쩍 뛸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한국은행이 수출입은행이 직접 출자를 하느니 마느니 재정을 쓰니 마니의 논란을 거쳐 결국 결론은 자본확충펀드를 통한 재원 마련, 정부의 추경 편성, 한국은행의 금리인하 라는 절충이 됐다.

이렇게라도 해서 정부가 의도한 구조조정이 성공적으로 진행됐다면 또 모르겠으나 조선과 해운 산업에 대한 정부의 접근을 보면 과연 그런 것인지 의문이다. 최근 정부가 철강과 석유화학 부문의 구조조정 청사진을 내놓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어차피 핵심이 다 빠져 있다는 거다. 구조조정은 만병통치약이 아니지만 적어도 정부가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는 분명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과정을 되짚어보면 구조조정은 그냥 해야 하니까 하는 것에 불과하며 이 와중에 벌어질 불상사에 대해 정부는 자신들의 책임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지만 생각하는 것처럼 비춰지는 게 사실이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왼쪽)와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 (연합뉴스)

단지 정권 말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에 의한 현상일까. 그렇게 보더라도 정치권의 전망 역시 답답하다는 게 문제다.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의 ‘국민성장론’을 “성장이 아닌 분배론”이라고 비판하고 국민의당 안철수 의원의 ‘창업국가론’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게 화제다. 그러나 보는 사람 입장에선 상당히 한가한 얘기처럼 들리는 게 사실이다.

유승민 의원이 내세우는 경제 정책 담론은 ‘혁신성장론’이라는데 “과학기술과 교육 개혁을 통해서 인재를 양성하고, 재벌이 지배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혁신중소기업과 혁신창업기업의 성장에 적합한 생태계로 시장을 개혁하고, 국가가 큰 역할을 담당하는 창업금융을 통해서 ‘창업’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이 핵심이라고 한다. 과거 박정희 정권은 중화학공업 육성을 추진하면서 국민의 과학화를 말했고 이후 기술과 교육을 연계해 이른바 ‘인적자원’을 개발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혁신창업기업’과 같은 단어는 김대중 정부 시절 벤처기업 육성론을 연상케 한다. 즉, 참여정부와 이명박 정부가 강하게 추진했던 금융화의 시기를 제외하면 유승민 의원이 언급하는 청사진은 역대 정부가 시도했던 여러 시도들의 재탕처럼 보인다. 과연 이런 청사진이 정부가 아무 책임도 안지겠다는 시대에 필요한 종류의 것인지 의문이다. 애초의 시도들이 무슨 효과를 낳았고 어떤 문제를 만들어 냈는지를 먼저 진단하는 게 우선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결국 5년 임기 단임제 정권으로서는 ‘무책임한 정부’라는 결말을 피할 수 없다며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한다. 개헌은 권력구조의 개편이라는 측면도 중요하겠지만 시대적 요구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 역시도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문제이다. 예를 들면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의원이 줄기차게 주장하는 ‘경제민주화’의 가장 확실한 근거는 헌법 119조 2항이다. 이런 종류의 요구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될 때만 헌법에 실체적 형태로 담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가 해야 할 일은 공론을 조성해 국민의 요구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를 제도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권 인사들의 대다수는 누가 권력을 잡을지에 대한 ‘게임’의 개념으로만 개헌에 접근한다. 과연 이게 책임있는 정치의 모습인지 의문이다. 정치인도 경제관료도 어떤 이익은 추구하면서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태도로 일관하는데 국민이 어떻게 희망적 미래를 그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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