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지상파방송사가 제작한 프로그램 가운데 이미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이를 적극 지원하고 육성해야 하는가?

도대체 이런 멍청한 물음도 있을까? 요즘 세대 용어로 이거야 말로 ‘당근’ 아닌가? 청와대와 한나라당, 방송통신위원회까지 여섯 달이 넘도록 자고 일어나면 ‘글로벌미디어기업 육성’ 운운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근의 당근’ 아닌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멍청한 물음을 던져야 하는 게 이 나라 방송계의 현주소다.

KBS가 야심차게 기획한 <차마고도>와 <누들로드> 등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폭력’, ‘섹스’, ‘스펙터클’이 아닌 교양 다큐멘터리가 해외 각국의 문화적 장벽을 넘어설 수 있음을 보여줬다. 동아시아로 흘러넘친 ‘한류’의 물결과는 또 다른 차원의 경쟁력이다. 청와대와 한나라당, 방송통신위의 사고방식에 따라 평가해보면, 글로벌미디어기업으로서 KBS의 가능성을 입증한 것이다.

차마고도와 누들로드를 탄생시킨 다큐멘터리 시리즈인 ‘인사이트 아시아’는 KBS가 3년 이내에 KBS라는 브랜드 가치를 영국의 BBC나 일본의 NHK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수준으로 높이려는 목표 하에 2006년 계획된 대형 프로젝트이다. 아시아 지역을 소재로 한 심층다큐멘터리는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통할 수 있는 킬러 콘텐츠였고, 특히 유럽 지역 수출을 목표로 하여 그 결과는 놀라웠다.

그동안 국내 프로그램의 해외수출이라고 하면 한류드라마를 연상했지만, 세계 유명 방송사들이 KBS라는 이름만으로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구매의사를 밝힐 정도로 성공했다. 차마고도의 경우, 이른바 ‘명품 다큐’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고, 준비된 마케팅과 수출 전략으로 총 17개국에 수출되어 30여개국에 방송되었다. 차마고도에 이어 누들로드 역시 10개국에 판매되는 대 히트를 기록한 바 있다.

고도의 기획과 제작단계에서 제작진들의 노력과 많은 제작비 투입이 중요한 성공 전략이었다. 기획, 제작, 배급 전 단계에서 ‘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한 ‘글로벌 전략’을 구사했고, 세계적으로 한 번도 영상으로 제작, 방영되지 않은 소재를 찾아 나섰다. 그러다보니 카메라는 어떻게 저런 화면을 담았을까 하는 경탄이 나올 정도의 오지 중의 오지로 향했다. 차마고도의 경우 총 제작기간 2년 가운데 순수 촬영기간만 1년 4개월에 달할 정도로 KBS 제작진의 피와 땀, 그리고 글로벌콘텐츠를 생산하기 위한 전사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성공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최근 KBS는 지난 4월 봄 개편 이후 다큐멘터리 시리즈인 ‘인사이트 아시아’의 후속 제작을 사실상 중단한 상태다. 아니 제작팀 자체를 해체했다. 왜? 돈이 없단다. 실소를 금할 수 없다. KBS 경영진은 해외에서도 통하는 유망한 프로그램 제작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재원 조달도 못하는 바보인가? 대기업의 자본을 끌어들여 인사이트 아시아 제작에서 나오는 수익을 나눌 수도 있다. 방법은 찾으면 얼마든지 있다. 다만 의지가 없을 뿐이며, 의지가 없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우리는 파악한다.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경영의 기본은 자원의 재배치와 재할당을 통해 상품생산과 유통에 이르는 과정의 효율성을 증대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이병순 사장을 비롯한 KBS 경영진이 찾은 해법이란 게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는 잘 나가는 프로그램의 제작 중단, ‘인사이트 아시아’ 제작팀의 공중분해다. 우리가 보기에는 오로지 정연주 전(?) 사장과 차별화를 위한 ‘정치 논리’ 이외에 다른 어떤 이유도 발견하기 어렵다. ‘정연주는 방만한 적자경영을 했는데, 이병순은 알뜰한 흑자경영’을 했다고 내세워 수신료 인상의 명분도 쌓고 사장 연임까지 노려도 보고 등등의 ‘정치 논리’ 말이다.

자, 이제 정리해 보자. ‘인사이트 아시아’의 사례는 우리에게 두 가지의 경험적 교훈을 제공한다. 첫째, 청와대와 정부, 한나라당이 추진 중인 대기업과 신문의 방송뉴스 소유를 뼈대로 하는 언론관련법 규제완화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현재 구조에서 공공서비스의 확대 발전을 통해 글로벌 경쟁에서 경제적, 문화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여건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는 점이다. 글로벌미디어기업은 어느날 갑자기 주문을 외워 ‘있으라 하메 출현하는’ 그런 게 아니다. ‘인사이트 아시아’와 같은 현실을 꾸준히 추구하는 ‘카르페디엠’에서 나오는 것이다.

둘째, 이병순 사장 체제 이후 잘 나가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제작마저 가로막음으로써, 사실상 KBS의 경영에 해를 입히는 업무상 배임에 대한 책임을 KBS 경영진에게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 정권과 한나라당에 의해 추천된 KBS이사회가 정연주 전 사장을 몰아내는 데 업무상 배임죄라는 감사원의 ‘정치적’ 판단이 결정적인 근거가 됐다는 사실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진짜 배임죄는 이병순 사장을 비롯한 현 경영진이 저지르고 있다는 얘기다.

셋째, 청와대와 정부, 한나라당은 글로벌미디어기업 육성을 명분으로 대기업과 신문의 방송뉴스 소유를 밀어붙이려 하는 한편, 청와대와 정부, 한나라당이 추천한 KBS이사회와 이들이 임명한 이병순 사장 이하 KBS 경영진은 글로벌미디어기업으로서 가능성을 보이는 프로그램의 제작을 중단시키고 제작팀을 해체했다. 이런 현실은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 일련의 방송장악 시도의 진행과정이라 평가할 수 있다. 글로벌 경쟁력이 있는 프로그램을 이미 제작하고 있는 현실을 지워버리겠다는 정치적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경쟁력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는 교양 프로듀서들에게 PD집필제를 실시해 노동강도를 심화시키고, 결국 프로그램 기획과 제작의 자율성·심층성을 위협하는 정책이 시행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더 이상, ‘관제방송’ KBS는 언론시민단체들만의 규정이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정국에서 목도했듯이, 수많은 시민들이 확인한 사안이다. KBS는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프로그램 제작마저 하지 않으면서, 관제방송 시비의 한 복판에 서 있다. 존재 의의가 깡그리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수신료 인상, 텄다. 미몽에서 깨어나 현실에 충실하라는 얘기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이 또한 공영방송이 적자를 흑자로 반전시키기 위해 모든 걸 내던지는 망령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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