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하이가 또 다시 심의에 걸렸다. 이번에는 보건복지가족부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이하 청보위)다.

지난 5월29일 청보위는 전자관보를 통해 에픽하이의 ‘8 By 8, Part2’, 김성수의 ‘말랑말랑’, 데프콘의 ‘Love Sugar’, 업타운의 ‘다줄게’ 등 국내음반 가운데 무려 48개의 곡을 청소년유해매체로 판정하였다. 에픽하이는 지난 3월에는 청보위로부터 ‘신사들의 절약정신’ ‘피해망상 Pt.3’ ‘뒷담화’ ‘신사들의 몰락’이 청소년유해매체 판정을 받았다. 그나마 에픽하이 정도나 되어야 미디어에 등장하기라도 하지, 그렇지 못한 가수들 앨범에 19금 딱지가 붙는 것은 알려지지도 않고 있다. 지난 3월에는 61개, 4월에는 58개의 곡이 청보위로부터 청소년유해매체 훈장(?)을 달았다.

▲ 에픽하이 "魂 : map the soul" 에 수록된 곡들은 방송사는 물론 청보위에서 제각각 다른 심의를 받았다. ⓒ www.mapthesoul.com
청보위의 청소년유해매체물 심의에 대한 불신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해 청보위가 선정적이라며 청소년유해매체물로 판정한 동방신기 ‘주문-미로틱’에 대해 SM엔터테인먼트가 행정법원에 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하였고, 이 과정에서 당시 청보위 음반심의위원이었던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씨가 항의의 뜻으로 위원직을 사퇴하기까지 이르렀다. 결국 행정법원은 동방신기의 손을 들어주었고, 청보위는 ‘망신’ 제대로 당했다. 청보위는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에 대한 항소장을 최근 제출하고, 또 한 번 법정 공방에 뛰어든 상황이다. 법리 공방이 어찌될지 결과는 알 수 없으나, 그저 구차할 뿐이다.

최근에도 음반 심의를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심의가 사회문화적 토론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심의를 둘러싼 논쟁과 투쟁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 안에서 ‘심의’가 수행되고 활용되는 것은 사회문화적 토론의 과정과는 거리가 먼 것이 현실이다. 사회적 맥락과 문화적 감수성 따위를 가지고 심의에 관한 논쟁을 벌일 판도 장도 없다. 다만 누군가가 19금 딱지를 붙일 뿐이다. 게다가 심의 구조가 이중 삼중의 복합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문화소비자 혹은 향유자, 시청자들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지난 1996년 사전심의에 대한 위헌판결 이후 음반심의는 사후심의를 받고 있다. 따라서 방송사가 자체적으로 방송여부를 판단하는 음반심의와 음반 발매 후 청보위의 심의로 나눠진다. 허나 방송사의 자체 심의나 청보위의 심의 모두 다수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자의적 해석과 전체적인 맥락과는 동떨어진 평가로 수많은 가요들이 앨범 속에 꽁꽁 묶이고 있다. 더욱이 같은 곡을 가지고도 KBS, MBC, SBS, 거기에 청보위까지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는 상황이니 암담할 뿐이다. 문화적 창작물을 기계에 넣고 과학적인 분류 방법으로 심의할 수 없는 노릇이다. 사람이 앉아 보고, 듣고, 품평해야 하는 것인데, 판단을 위임받은 이들은 제각각 다른 소리를 하고 있으니, 권위는 고사하고 기본적인 신뢰까지 아주 위태로운 상황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청보위의 청소년유해매체물 선정 과정이 과연 실효성을 가질 수 있는가도 의문이다. 동방신기의 ‘주문-미로틱’과 백지영의 ‘입술을 주고’, 비의 ‘레이니즘’ 등이 청보위의 청소년유해매체물 판정이 된 시점은 이미 해당 가수들의 활동이 막바지에 이를 때다. 음반은 수없이 풀렸고, TV를 통해서도 수없이 그들의 공연모습을 봤다. 그런데 뒤늦게 19금 딱지가 붙는다. 이미 많은 이들이 이와 같은 청보위의 음반 심의 절차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왔다.

5월에 발표한 청보위의 청소년유해매체물은 3월 발매 음반들이 다수다. 에픽하이의 ‘8 By 8, Part 2’가 수록된 앨범 ‘魂, Map The Soul’은 3월27일에, 김성수의 ‘말랑말랑’이 담긴 앨범 ‘The F4 Story’는 3월30일에 발매되었다. 이런 경우는 그나마 양호하다. ‘kiss’ ‘Delicious(니 입술이)’ ‘이런 여자가 좋아’ 세 곡이 청소년유해매체물로 판정된 박진영의 ‘Back to Stage’ 앨범의 경우 2007년 11월16일 발매되었으나, 청보위에서는 2008년 12월18일 청소년유해매체물로 결정하였고, 그 효력은 2009년 1월5일 발생하였다. 어처구니가 없다. 1년이 지난 심의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청보위의 심의 구조와 운영이 허점투성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선명한 증거다.

음반을 문화적 창작물로 접근하는 평가와 토론의 장은 협소하기만 하다. 나날이 신뢰를 잃고 있는 청보위와 방송사의 음반 심의는 창작자는 물론 향유자에게도 불이익을 강요하고 있다. 토론은커녕 공감을 일으킬 수 없는 자의적인 해석과 실효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청보위의 심의 구조로 인해 대중음악은 그저 막대한 고충을 겪고 있다. 문화적으로나 산업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다. 다른 문화적 창작물과의 형평성 문제 역시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상황임을 감안할 때, 청보위나 방송사 자체심의가 신뢰를 회복하기란 매우 어려워 보인다. 드라마 속 연인들의 키스는 아름답게 묘사되지만, 가요에서 그 상황을 묘사하면 ‘음란’해지는 상황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술마시고 해롱거리는 연기는 괜찮지만, 가요에서 ‘술’을 입에 대면 청소년유해매체로 선정되는 어처구니없음을 어떻게 이해하면 된단 말인가?

심의는 언제나 대중문화에 있어 주요한 화두이다. 다양한 문화적 상상력과 감수성, 취향이 제도·주류와 부딪혀 싸우지 못한다면 당대의 문화는 고여 종국에 썩을 수밖에 없다. 맥락과 내용이 상실되고, 후진 제도와 법으로 인해 토론조차 불능한 심의 제도를 수술대에 올라야 한다. 지금도 너무 늦은 시간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노래는 그렇게 묻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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