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죽지세로 나가던 도널드 트럼프가 위기에 빠졌다. 과거 TV프로그램 출연을 준비하던 중 진행자와 나눈 ‘음담패설’이 공개된 것이다. 유부남이 유부녀를 대상으로 한 이 ‘음담패설’은 크게 두 가지 부분에서 충격을 주고 있다. 첫 번째는 이 발언이 여성에 대한 성적 공격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보수주의자들의 전통적 가치를 무너뜨린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국내의 모 언론은 아예 ‘트럼프는 끝났다’고 쓸 정도로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미 공화당의 주요 인사들이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비난 대열에 동참하면서 미국 보수정치가 뿌리째 흔들리는 양상이다. 이에 앞서 뉴욕타임스가 터뜨린 세금 탈루 문제는 이해를 위한 복잡한 사고가 필요하지만 ‘음담패설’은 판단을 내리기 위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다. 웬만한 정치인의 경우라면 이 시점에서 후보 사퇴를 선언할 수밖에 없다. 도널드 트럼프는 진심으로 사죄한다는 이례적인(?) 메시지를 내놓으면서도 중도하차는 없다고 못 박고 있다.

이런 시점에 동아일보가 도널드 트럼프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교하는 칼럼을 지면에 실은 것은 흥미롭다. 동아일보는 10일자 지면에 최영해 국제부장이 쓴 <트럼프에겐 있고 힐러리에겐 없는 것>이란 제목의 글을 실었다. 이 글에서 최영해 국제부장은 현재 미 대선 판도를 2002년 당시 한국 대선과 비교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간의 유사성을 언급했다. 그가 도널드 트럼프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한 근거는 두 사람 다 주류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대통령 후보가 실제로 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을 깼고, 주류 언론과 대립하고 있으며, 거침없고 대중적인 말투로 대중을 휘어잡고 있다는 점이다.

동아일보 10일자 지면에 실린 칼럼

표면적으로만 보면 그럴듯한 소리로 들리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핀트가 많이 엇나간 얘기라는 걸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최영해 국제부장이 지적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그러면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라는 말은 일종의 자유주의적 가치를 지시하는 어법으로 볼 수 있다. 부모가 특정한 정치적 활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자녀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은 권위주의적 체제의 특징이다. 부모와 자녀의 정치적 지향이 일치할 가능성은 크지 않고 설사 일치한다 하더라도 이는 별개로 다뤄야 할 문제라는 건 ‘합리적 판단’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시 발언은 이러한 ‘합리적 판단’을 드라마틱하게 요청한 걸로 볼 수 있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가 내세우는 미국 우선주의와 소수자 혐오는 “안 될 게 뭐 있느냐”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이야 말로 트럼프 지지자들이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는 논리의 핵심을 구성한다. 미국 기성 정치는 합리적 가치와 판단을 대중에 강요해왔으나 현실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거나 오히려 커졌다. 따라서 기성 질서가 금지한, 예를 들면 인종주의적 태도를 굳이 손해를 보면서 자기검열하며 자제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만들겠다거나 무슬림들을 내쫓아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 먹힌다.

2005년 드라마 '우리 삶의 나날들'의 카메오 출연을 위해 녹화장을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가운데)와 미 연예매체 '액세스 할리우드'의 빌리 부시(왼쪽), 여배우 아리안 저커(오른쪽) (워싱턴포스트 화면 캡처/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가 ‘음담패설’ 논란에도 버틸 수 있는 건 지지자들의 이런 성향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기성 정치를 위해 살아온 사람이 아니며 협상에서 이기기 위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온 사업가 출신이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이번 파문에 대해서도 ‘사실은 모든 남자들이 다 비슷한 생각과 언행을 보여주고 있지 않느냐’고 반응한다. 이들의 인식 속에서 ‘정치’란 모두 가식과 거짓으로 뒤덮여 있을 뿐이다. 즉, 민주당 지지자들이 점잖게 말하는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합의를 이끌어 내는 ‘진정한 정치’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속물적 욕망과 이를 관철시키는 ‘힘’만이 중요하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주장한 것은 이런 것과는 정반대로서 의미의 정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줄곧 ‘진정한 정치’가 있고 기성 정치는 그 ‘진정한 정치’에 해당하지 않으며, 그 ‘진정한 정치’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들이 ‘진정한 정치’에 대해 주장한 것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정치가 합리적 가치를 근거로 삼아야 한다는 거였다. 어떤 면에서 이는 자유주의적 정치관으로 해설할 수 있다. 그런데 기성 정치가 잘못됐다고 판단하는 건 도널드 트럼프도 마찬가지지만 이들의 결론은 자유주의적 정치를 폐기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양자는 전혀 다른 종류의 정치를 요청하고 있는 걸로 보아야 한다.

물론 미국과 비교해 한국의 정치가 더 건전하고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미국이 도널드 트럼프의 부상을 통해 드러낸 그 문제는 이미 우리 정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당선은 결국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주장한 정치가 실패한 결과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을 둘러싼 정치적 에너지야 말로 오늘날 도널드 트럼프가 말하는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BBK 등 여러 도덕적 의문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당 후보를 누르고 600만표 차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며 당선됐기 때문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청계천 개통 11년 기념일인 1일 오전 서울 중구 청계천을 걷고 있다. (연합뉴스)

당시의 여당, 그러니까 현재의 야권은 이명박 후보의 여러 도덕적 결점에 대해 맹비난하는 것에 선거 캠페인의 초점을 맞추었다. 이명박 지지자들의 반응은 “안 될 게 뭐 있느냐”는 거였다. 사업을 하다 보면 법을 어길 수도 있고 도덕적 가치에 맞지 않는 삶을 살 수도 있다는 거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당시 지지 논리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온갖 단점에도 불구하고 도널드 트럼프가 ‘협상의 기술’을 통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거의 판박이다.

당시 이명박 후보의 선거 슬로건 중 하나는 ‘부자 되세요’ 였다. 도덕과 윤리에 대한 여러 정치적 공방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실제로 유권자가 돈을 벌 수 있도록 해주는 실용적 태도가 중요하다는 거다. 여기서 ‘실용적 태도’란 결국 개인을 강자로 만드는 경제에 대한 어떤 ‘능력’이다. 정치가 어떤 능력들의 경쟁이 아니라 대화와 협상,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결국 ‘이명박의 정치’는 본질적으로 바람직한 형태의 정치가 아니다.

박근혜 시대는 이명박 정권이 내세운 최소한의 당위와 가치마저도 무너뜨리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더러 부자가 되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북한 문제든 경제든 우리가 큰 위기에 빠졌으니 딴 소리 말고 시키는 대로나 하라고 한다. 야권이 미르 K스포츠 재단 등에 대한 온갖 의혹을 제기해도 무반응으로 일관한다. ‘삼권분립’이라는 근대 정치의 기본은 이미 무시당한 지 오래됐다. 박근혜 시대는 정치가 내세우는 당위와 명분, 즉 어떤 ‘선비질’을 거부한 결과가 ‘힘’에 대한 의지로 전화하는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즉, 우리가 도널드 트럼프를 통해 보아야 하는 것은 과거의 어떤 ‘바람 선거’에 대한 왜곡된 추억이 아닌 현재의 정치이다. 이미 우리는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를 만든 정치에 대한 냉소적 에너지에 지배당하고 있다. 이를 거스르기 위해선 당위와 명분을 말하는 정치를 이전에 실패한 그 지점에서 또다시 시도해야 한다. 왜 사람들이 현재 언급되는 모든 대권주자들에 대해 “대통령감이 아니다”라고 말하는지에 대해 우리 정치가 이제는 답을 말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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