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언론이 자살을 다루는 방식은 대상과 성격에 따라 갈린다. 이름 없는 사람이 지하철에 몸을 던졌을 때는 사건 발생 개요에 이어 한 문장으로 된 자살 동기 분석과 역시 한 문장으로 된 열차 지연 사실을 병렬 배치한다. 자살 동기는 철저히 ‘개인화’된다. 생활고 비관, 성적 비관 같은 사유에 대해 사회적 맥락을 짚는 일은 드물다. ‘사회화’되는 것은 오직 공중의 피해(열차 지연)뿐이다. 택배 노동자 박종태씨 자살 보도도 이 프레임을 넘어서지 않고 있다.
자살자가 유명 연예인일 때는 보도 전체에 상업주의가 관통한다. 조문 오는 동료 연예인들 모습 사진 한 장 한 장이 뉴스가 된다. 이른바 ‘조문 저널리즘’이다. 자살 동기와 관련해서도 온갖 추론이 쏟아지고, 이들 추론은 쑥덕공론과 괴소문으로 확산하며, 언론은 그걸 받아 다시 보도하는 확대재생산 사이클이 형성된다. 자살자에게 애도를 나타내는 건 TV 연예정보프로그램 정도지만, 이마저도 조금이라도 소비를 더 부추기려는 마케팅의 일부일 뿐이다.
연예인 자살 뉴스도 단순한 상품 소비를 넘어서 정치·사회화되는 경우가 더러 있긴 하다. 고 최진실 씨가 자살하자 사이버 모욕죄 도입을 둘러싸고 정치권의 여-야, 정부-시민사회, 언론계 내부에서 팽팽한 대립전선이 그어졌다. 여기서는 자살 동기 규정(“악성댓글 때문에 자살했다”)이 강력한 권력행위가 된다. 고 장자연 씨 자살 사건은 특정 언론이 사건에 연관돼 보도 자체가 극도로 위축됐는데, 이 경우는 뉴스 유통에 대해 권력이 작용한 셈이다.
이들의 애도는 “우리처럼 모든 차이와 분열, 갈등을 초월해 오로지 슬퍼만 하고 삼가 고인의 명복만 빌라”는 메시지의 ‘탈정치화’ 기획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자체가 고도의 정치적 행위다. 이들의 기획에는 박종태씨 자살 ‘보도’ 방식과 장자연 씨 자살 ‘대응’ 방식이 모두 반영돼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자살 동기와 자살 이후 모두를 개인화하고, 이 죽음에 자신들이 연관된 것처럼 비치는 것을 막기 위한 통제 조처다.
이들이 기대하는 건 ‘표출’이 아닌 ‘배설’이다. 그러려면 생각 없이 슬퍼하기만 해야 한다. 주류언론의 압도적인 ‘애도 저널리즘’이 하나도 슬프게 보이지 않는다면 바로 그런 노림수 때문이다.
※ 이 글은 <한국방송대학보> 제1542호(2009-06-01)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