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언론이 자살을 다루는 방식은 대상과 성격에 따라 갈린다. 이름 없는 사람이 지하철에 몸을 던졌을 때는 사건 발생 개요에 이어 한 문장으로 된 자살 동기 분석과 역시 한 문장으로 된 열차 지연 사실을 병렬 배치한다. 자살 동기는 철저히 ‘개인화’된다. 생활고 비관, 성적 비관 같은 사유에 대해 사회적 맥락을 짚는 일은 드물다. ‘사회화’되는 것은 오직 공중의 피해(열차 지연)뿐이다. 택배 노동자 박종태씨 자살 보도도 이 프레임을 넘어서지 않고 있다.

자살자가 유명 연예인일 때는 보도 전체에 상업주의가 관통한다. 조문 오는 동료 연예인들 모습 사진 한 장 한 장이 뉴스가 된다. 이른바 ‘조문 저널리즘’이다. 자살 동기와 관련해서도 온갖 추론이 쏟아지고, 이들 추론은 쑥덕공론과 괴소문으로 확산하며, 언론은 그걸 받아 다시 보도하는 확대재생산 사이클이 형성된다. 자살자에게 애도를 나타내는 건 TV 연예정보프로그램 정도지만, 이마저도 조금이라도 소비를 더 부추기려는 마케팅의 일부일 뿐이다.

연예인 자살 뉴스도 단순한 상품 소비를 넘어서 정치·사회화되는 경우가 더러 있긴 하다. 고 최진실 씨가 자살하자 사이버 모욕죄 도입을 둘러싸고 정치권의 여-야, 정부-시민사회, 언론계 내부에서 팽팽한 대립전선이 그어졌다. 여기서는 자살 동기 규정(“악성댓글 때문에 자살했다”)이 강력한 권력행위가 된다. 고 장자연 씨 자살 사건은 특정 언론이 사건에 연관돼 보도 자체가 극도로 위축됐는데, 이 경우는 뉴스 유통에 대해 권력이 작용한 셈이다.

▲ 중앙일보 5월 30일자 2면.
‘정치적’ 성격이 짙은 인물이 자살할 경우 저널리즘의 대응은 한층 전략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한국사회 전체를 강타한 초대형 ‘정치사건’이다. 주류 언론은 곧바로 호외 발행과 특별방송 편성으로 값했다. 그리고 일제히 애도를 표했다. 그러나 애도는 순정한 감정 드러내기가 아니었다. 일부 언론은 애도란 오로지 순정한 감정 표현이므로 그의 자살에 대해 애도 이상의 어떤 의미 부여도, 행동도 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들의 애도는 “우리처럼 모든 차이와 분열, 갈등을 초월해 오로지 슬퍼만 하고 삼가 고인의 명복만 빌라”는 메시지의 ‘탈정치화’ 기획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자체가 고도의 정치적 행위다. 이들의 기획에는 박종태씨 자살 ‘보도’ 방식과 장자연 씨 자살 ‘대응’ 방식이 모두 반영돼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자살 동기와 자살 이후 모두를 개인화하고, 이 죽음에 자신들이 연관된 것처럼 비치는 것을 막기 위한 통제 조처다.

이들이 기대하는 건 ‘표출’이 아닌 ‘배설’이다. 그러려면 생각 없이 슬퍼하기만 해야 한다. 주류언론의 압도적인 ‘애도 저널리즘’이 하나도 슬프게 보이지 않는다면 바로 그런 노림수 때문이다.

※ 이 글은 <한국방송대학보> 제1542호(2009-06-01)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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