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 김제동 씨의 이름이 국정감사장에서 나오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국방부 차관 출신이자 새누리당 경북도당 위원장을 맡고 있는 새누리당 백승주 의원이 제기한 문제 때문이다. 국회 국방위의 분위기는 김제동 씨에 대한 증인 출석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기울고 있으나 백승주 의원이 이런 문제제기를 한 배경에 대한 논란은 확대되고 있다.

백승주 의원은 지난해 7월 모 방송에 출연한 김제동 씨의 ‘농담’을 문제 삼고 있다. 화제가 되고 있는 이 ‘농담’은 김제동 씨가 군 복무 중 행사에서 사회를 보면서 4성장군의 부인을 ‘아주머니’라 불러 영창에 갔다는 내용이다. 김제동 씨는 영창을 나올 때에도 “다시는 아줌마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라고 3회 복창했다고 주장한 걸로 알려진다. 백승주 의원은 이를 “우리 군 간부를 조롱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백승주 의원의 이런 주장은 남성의 절대다수가 군을 경험한 우리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규모의 공감과 지지를 받고 있는 걸로 보인다.

2014년 토크 콘서트를 진행하는 방송인 김제동 씨. (연합뉴스)

이런 괴상한 논란을 보며 미국의 스탠딩 코미디 문화를 떠올린다. 미국의 한 코미디언이 즐겨 하는 농담 중에는 대통령에게 욕을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바마 미 대통령이 다짜고짜 전화를 해서는 욕설을 하더라는 거다. 그래서 “대통령이 코미디언에게 욕을 했다는 사실을 폭로 하겠다”며 반발했더니, 오바마 미 대통령이 했다는 말. “당신이 그걸 폭로한들 대통령이 코미디언에게 전화를 해서 아무 이유도 없이 욕설을 했다는 말을 누가 믿겠소?”

이 농담을 한 코미디언이 고발을 당했다거나 의회 출석을 강요당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일이 없다. 왜냐면 이런 종류의 농담은 그 내용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농담은 권력이 비상식적인 수단을 동원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조건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즉, 권력에 대한 어떤 풍자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거다. 권력을 풍자하는 일은 약자에게 불리하게 조성된 공론의 장에서 균형을 맞추도록 하는 하나의 요소이다.

미국의 경우 대통령이 직접 이런 농담의 주인공으로 나서기도 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식인종 농담’과 같은 말장난은 가볍게 능가하는 수준이다. 특히 유명한 것은 2015년 백악관 출입기자단과의 만찬이다. 이 자리에 연설에 나선 오바마 대통령은 배우이자 코미디언인 키건 마이클을 ‘분노통역사’로 세웠다.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정치 현안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화를 낼 수 없으니, 이런 감정을 대변해주는 ‘분노통역사’가 필요하다는 논리다.

오바마 대통령이 “언론과 정부는 서로 다르지만 상당 부분을 의존 합니다”라고 점잖게 말하면 뒤에 서있는 분노통역사가 다소 과장된 손짓을 곁들여 “폭스뉴스는 백인 노인들을 대변하면서 무슬림들을 악마처럼 취급했고, CNN은 에볼라 바이러스 소식을 마치 드라마 ‘워킹데드’의 현실화처럼 전하면서 걸프만 기름 유출에 대해 소극적으로 보도했다”고 말하는 식이다. 이 연설은 기후변화 문제를 논하는 대목에 가서 오바마 대통령이 지나치게 흥분하자 분노통역사가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는 것으로 끝난다. 이 농담의 놀라운 점은 오바마 대통령이 언론과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들에 대한 ‘서운함’을 표시하면서도 그걸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건 부적절하다는 인식에 동의한다는 점을 동시에 드러낸다는 거다.

물론 경험과 전통이 다른 한국과 미국의 코미디가 같은 기준에서만 논의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농담’의 본질을 고려하면 최소한의 선을 그을 수는 있다. ‘권력에 대한 풍자’는 폭넓게 허용되어야 하나 ‘약자에 대한 조롱’은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거다. 즉, ‘표현의 자유’는 일방적으로 형성된 권력의 구도를 바로잡기 위한 도구로 쓰여져야 한다는 게 최소한의 이룰 수 있는 합의다.

이런 관점에서 김제동 씨의 농담을 볼 필요가 있다. 이런 관점에선 김제동 씨의 농담이 스스로 겪은 사실의 경험을 이야기 한 것인지 가공된 어떤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인지를 따지는 것은 중요치 않다. 김제동 씨의 농담은 결국 군대의 질서가 비합리적인 작동방식을 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즉, 이는 권력과 체제에 대한 풍자로서 코미디의 본질에 들어맞는 성격의 것이다.

언론은 김제동 씨가 단기사병으로 복무한 시기와 장소를 따지면 그가 언급한 ‘4성장군’이 누군지를 추정할 수 있다며 ‘명예훼손’이 될 수 있는지 여부까지 따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그야말로 과도한 흠집내기에 불과한 걸로 보인다. 오히려 의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이를 문제 삼는 새누리당 백승주 의원의 의도다. 소셜미디어 등 공간에서는 김제동 씨가 그간 보수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해왔고 최근 사드 배치 지역인 성주군에 가서 직접 사드 배치 반대 발언을 했다는 것에 대한 정권 차원의 ‘경고’가 아니겠느냐고 해석하고 있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 시절 정부에 비판적인 연예인들이 이런 저런 견제를 받았고 그 대상 중 하나가 김제동 씨였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이런 추측에는 일리가 있어 보인다.

이런 얘길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김제동 씨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주기 위해선 반대편의 ‘표현의 자유’도 보장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실제로 그간 인터넷에서 여성과 특정 지역에 대한 비하로 일관해 온 세력들이 이런 주장을 자주 한다. 그러나 이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잘못된 규정에서 비롯된 걸로 보인다. 표현의 자유는 권력이 시민의 표현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포괄한다. 표현의 자유는 누가 어느 편인지에 따라 편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즉,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보장할 것이냐를 판단하는 기준은 누가 어느 편에서 말하느냐가 아니라 그 ‘표현’이 현실의 권력구도를 어떤 방식으로 반영하고 있는가이다.

지난달 말 '백남기 농민 사망 국가폭력 규탄 시국선언'에서 고 백남기 씨의 둘째 딸 백민주화(왼쪽)씨가 아버지의 시신 부검을 반대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를테면 일부 보수적 네티즌들이 고 백남기 씨의 유가족들에 대한 모욕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는 상황을 돌아보자. 어느 웹툰작가를 비롯한 일군의 무리들은 백남기 씨의 딸인 백민주화 씨가 대표적 관광지인 발리에서 소셜미디어 등을 이용했다는 점을 문제 삼으면서 ‘아버지가 위독한데 관광을 즐겼다더라’며 헐뜯는데 여념이 없다. 소셜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또 다른 딸인 백도라지 씨는 최근 ‘아버지가 위독한데 인터넷에 쓸데없는 얘기나 쓴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권력이 백남기 씨의 사인에 대한 논란을 ‘물타기’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적어도 경찰의 강경진압이 백남기 씨를 의식불명의 상태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사안에 있어서 공권력에 의해 부당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조롱하는 여러 표현들은 사회적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런 식의 분별없는 조롱은 결국 정치적 냉소주의와 조응해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게 가해졌던 사회적 폭력의 재현을 낳을 것이다.

물론 이런 비판을 제기해도 굳이 백남기 씨 유가족들을 모욕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사람들은 ‘너는 되고 왜 난 안 되느냐’는 식의 소비자적 태도로 일관하며 모든 담론적 쟁점을 무력화할 것이다. 바로 이런 태도가 만연하기 때문에 백승주 의원 같은 사람들이 김제동 씨의 농담을 문제 삼으며 정치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야당의 모든 문제제기를 ‘불순한 의도’로 규정하면서 정작 자신의 의도는 말하지 않는 것도 같은 원리다. 이런 아수라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근본적 차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모든 문제를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기준으로만 판단하는 세태와 싸우는 것이다. 멀고 험한 길이지만 용기있는 한 발짝을 내딛는 것 외에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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