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는 고인의 뜻을 ‘화합과 단합’으로 읽었다. 2009년 국무위원 재정전략회의에서의 위기 극복을 위한 선제적이고 과감한 조치를 강조하며, 발언했다. 하나의 죽음이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는 것은 사회의 구조 측면에선 바람직한 일이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지성이 다원적으로 경합하고, 인식이 상호텍스트성을 갖는다면, 성숙한 사회이다. 그 기반 위에서 민주주의는 무르익는다.
‘화합과 단합’의 맥락에서 살펴보자. 비단, MB만의 해석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조중동이, 심지어 민주당도 이 죽음을 두고 ‘화합과 단합’을 강조하고 있다. 상중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일체의 정치적 일정은 중단되었고, 배제와 투쟁은 잠시 접자는 분위기이다. 정치적 입장들의 제도적 측면에선,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에 있어서는 원활한 합의이다. MB는 기꺼이 국민장을 받았고, 영결식 날에는 경복궁 앞뜰을 터주기로 했다. 별 문제는 없는 것인가, 이로써 ‘화합과 단합’의 유지는 받들어지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착시일 뿐이다.
전선은 덕수궁 대한문이다. 다시, ‘광장’이다. 아무리 유서를 읽어봐도, 그 뜻이 ‘화합과 단합’이라고 나는 해석되질 않는다. 이건 ‘정치’적인 죽음이다. 그의 죽음에 ‘원한과 분노’가 일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를 밀었다. 그에게 ‘포괄적 뇌물죄’라는 것이 성립된다면, 누군가에겐 ‘포괄절 살인죄’가 성립된다는 법 감정 말이다. 이건, 노무현 생전의 정치적 치적, 통치의 공과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뛰어넘는 바로 오늘, 현실의 문제이다. 그의 죽음을 단순히 미화하거나, 허투루 박제해선 곤란하다. 슬픔으로, ‘당신은 우리의 대통령’이므로 역사의 평가가 필요하리라는 수사로, 현실의 문제를 봉합해선 안 된다는 말이다. 문제는, 다시 ‘광장’이다.
그래서 말이다. 민주당이 광장을 열어라. 광장을 여는 정치적 기획을 할 수 없다면, 민주당은 차라리 정치를 않는 것이 낫다. 자연 발생적 추모에 업혀가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정치적 기획력으로는 척박한 현실 정치 풍토에서 영원히 자립할 수 없다. 민주당 출신의 대통령이 철저히 ‘정치’에 의한, ‘정치’를 위한 ‘정치’적인 서거를 맞은 상황에서 울고불고 짜는 퍼포먼스만 연출하는 것은 너무나 정치적이지 못한, 동호회 회원들이나 할 낭만적 동질화일 뿐이다.
모든 것의 출발은 ‘광장’을 여는 것에서 시작한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영정 사진을 들고 천천히 광장으로 걸어가도 좋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경호실장이라던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차벽 앞에 가서 주저앉는 것도 좋다. 뭐든 좋다. 이 정치적 죽음의 정치성을 폭로할 수 있는 일련의 정치적 기획을 할 수 있어야 이 죽음이 만들어낸 정치적 국면에서 정치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그게 정당, 정치세력, 야당이다.
민주당이여, ‘화합과 단합’이라고 하는 끝없이 아련하기만 한, 평생의 이상향 같은 유토피아를 향해 이번 죽음을 안고 갇혀가지 말라. 그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헛소리를 구체적이고 행위적으로 깰 수 있어야 비로소 정치적 전망이 열린다. 유서는 그렇게 읽혔다. 비주류 정치인 노무현을 대통령으로까지 밀어올린 힘, 유지 역시 바로 그것이 아니겠나? 구체적이고 행위적인 실천력 말이다. 고인의 뜻을 따라 우선, 광장부터 열어라.
‘탈권위’에서 ‘권위 만능’으로, 노무현에서 이명박으로 시대가 이행된 과정은 이명박의 득점보다는 노무현의 실점에 의해, 노무현의 실점보단 민주당의 실책 때문에 발생한 과정이었다. 불행스럽게도 더 이상 노무현은 실점조차 할 수 없게 됐다. 이명박의 1년 실점은 이미 노무현의 5년보다 많다. 이제, 민주당이 득점할 차례이다. 민주당은 노무현 이후에도 끝내 차려진 밥상조차 못 받아먹는 응석받이로 남을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