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사람의 전직, 그리고 두 사람의 현직 엘리트 검사가 구속되었다. 세 사람의 탐욕과 몰락에는 전부 고교동창, 대학동창 같은 학맥이 등장한다. 가장 최근 구속된 김형준은 유명짜한 전직 국회의장을 장인으로 둔 것으로 보아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처가덕도 제법 보지 않았을까 싶다.

평준화 후에 학맥은 한국사회의 주류가 기득권 네트워크를 유지강화하던 수단으로서 그 역할이 줄어들 것이라 기대했다. 그런데 대학과 소위 신흥명문들이 바톤터치를 한 것이다. 조만간 이름난 외고출신들이 각계의 중추가 되면 학맥의 위력은 배가될 것이다. 과거의 명문은 시골출신이라도 열심히 하면 능히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의 외고는 입학전부터 엄청난 사교육비를 감당할 능력있는 부모가 없으면 언감생심 엄두도 내지 못한다. 압도적으로 강남 출신 학생의 비중이 높은 이유다. 이미 동질성이 높은 학생들이 더 끈끈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되면 배타적 성채를 쌓기 마련이다.

'스폰서·수사무마 청탁' 의혹을 받은 김형준 부장검사가 29일 새벽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뒤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차에 올라 구치소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기득권의 성채에 들어가기 위한 중상층의 노력은 대한민국 0.1%가 기득권을 강화하는 방식에 비하면 족탈불급이다. 그들의 방식은 주로 혼맥이다. 정, 재, 관, 언이 사돈, 하나 건너 사돈, 겹사돈을 맺으며 거대한 하나의 그물망을 형성하고 있다. 4자가 대등하지는 않고 재벌이 주도적으로 정과 관, 언을 끌어들여 혼맥을 맺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80년대를 거치면서 자본의 힘이 더 우위에 서게 되면서 그런 경향이 더 강해졌다. 이학수의 녹취록에서 드러난 것처럼 혼맥으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은 돈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심감을 드러냈고, 머리좋고 공부 많이한 중상층 출신 신층사족들이 기꺼이 행랑채에라도 들어가려 애쓰고 있다.

재야 역사학자 이덕일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란 책에서 조선 후기를 지배한 노론을 친일파의 뿌리로 지목한다. 그들이 오늘날의 기득권 세력까지 이어진다는 논리도 폈다. 세도정치 등장이후 노론이 몰락했다는 역사적 평가를 보면 당대 기득권 세력의 권력이 지금까지 단절 없이 이어졌다는 것은 무리로 보인다. 다만 그들이 권력을 독점하던 원리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것을 확인한다. 강력한 네트워크를 만들고 경계를 짓는 것이다. 당시의 권력집단은 사제관계나 혼인관계를 맺은 소위 장안의 명문가들끼리 과거의 당락을 결정하고, 중앙의 요직을 독점했다.

기득권 세력의 생존방식은 생물학적 발견에 반한다. 어떤 생물종이 동종교배를 일삼게 되면 유전자의 다양성이 줄어들고, 전염병 등 외부 환경에 약한 열성 유전자가 발현되면서 종 자체가 멸종에 이를 수도 있다고 한다. 신라가 쇠망한 원인이 결혼도 골품내에서만 할정도로 폐쇄적인 골품제도를 유지한데서 찾는 학자들도 있다. 골품내부의 제한된 결혼 자원 중에서 배우자를 찾다보니 삼촌이나 조카 등과 혼인하는 등 근친결혼이 자주 발생했고, 이것이 유전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동종교배보다 이종교배가 좋다는 유전학적 깨달음은 조직과 사회일반, 학문영역에도 적용된다. 좋고 잘나가는 기업일수록 엉뚱하고 다른 생각이 권장된다. 다른 것을 수용하지 못하는 폐쇄된 조직은 일견 일사분란하게 보일지 모르나 외부 변화에 적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외국의 좋은 대학들은 같은 대학 출신을 교수로 선호하지 않는다. 다양한 학문적 입장이 부딪쳐야 발전이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강한 이유는 이종교배, 화이부동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폐쇄적인 울타리 안에서 동종교배만 하는 기득권 세력은 결국 약화될테니 그냥 놔둬도 기득권은 자연스럽게 해체될 것인가?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저들이 부와 권력을 대부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저들이 몰락하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전체도 몰락한다. 저들에게서 한국호의 키를 빼앗지 않으면 공도공망이다. 재벌을 개혁하지 않으면 재벌은 결국 망할 것이고, 그 피해는 온전히 우리 국민에게 전가될 것이다.

기득권 세력의 전유물인줄 알았던 폐쇄성이 양대 정당에도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는 여야 모두 주류와 비주류가 공존하면서 경쟁했다. 심지어 3김정치 시절에도 비주류가 참여할 수 있는 통로가 보장되어 있었다. 지난 전당대회를 거치면서 지금 양당은 각각 기득권을 가진 패권집단이 당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그들의 독주는 예견된 결과다. 오랜 기간 우리 사회 기득권 세력의 수호신을 자처해온 새누리당의 행태는 그리 놀랍지 않다. 더구나 배후에 살아있는 권력이 작동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에 비해 민주당의 퇴보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리사회의 기득권 세력에 대항하는 최전선에 서야할 야당에서 패권집단이 저들의 생존방식을 그대로 빼닮은 짓을 하고 있다. 경계를 구분하고,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을 배제하고, 권력을 독점한다.

고려말의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대립, 조선 중기 성종 치세의 훈구파와 사림의 대립, 조선 후기 노론과 남인의 대립 등 어느 시대에나 기득권 세력과 이를 혁파하려는 개혁세력의 대립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부분 엘리트들 안에서의 갈등이었다. 기존 엘리트 세력의 개혁이 실패하면 민란이 발생하거나 동학혁명처럼 더 근본적인 갈등이 분출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민란이 일어나기 일보직전이다. 중산층과 서민들의 삶은 갈수록 어려워지는데 특권 네트워크를 구축한 기득권 세력의 갑질은 눈뜨고 볼 수가 없을 지경이다. 이를 막아야 할 야당 안의 패권세력은 스스로 기득권 세력이 되어 벽을 쌓고 있다. 민란을 주도할 개혁세력의 새로운 진지를 구축하는 길 밖에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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