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해서 더 유명해졌다. 원래는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는 문장이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여기에 정치적 성격을 가미하면서 어떤 권력도 순리를 거부할 수는 없다는 뜻으로 많이 받아 들여 진다. 당시 ‘새벽’은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오늘날의 박근혜 정권의 처지에 비해보면 ‘레임덕’을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즉, ‘닭의 목을 비틀어도 레임덕은 온다’는 거다.

박근혜 정권은 임기 말 레임덕을 막기 위해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을 중심으로 수사기관과 정보기관을 완전히 장악했다. 야당이 ‘우병우 사단’이라는 조어를 만들어 낼 정도였다. 그러나 최근 제기되는 미르 K스포츠재단 의혹과 관련한 정치적 공세 속에서 검찰이 처한 처지를 돌아보면 과연 ‘우병우 사단’이 건재한 것인지 의문을 갖게 한다.

대표적인 예는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의 구속영장 기각이다. 검찰은 그간 롯데그룹 수사를 진행하면서 다소 자신감 없는 태도를 보여왔다. 애초에 ‘비자금’ 문제에 핵심을 두고 권력형 비리로 상황을 몰아가는 분위기였는데, 수사가 검찰의 생각대로 진척되지 않으면서 기업 경영과 관련한 문제들로 의혹의 성격이 바뀌어 버렸다. 이 때문에 검찰이 신동빈 회장을 직접 수사하고 나서 구속영장을 청구할 때까지 수일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고심 끝에 청구한 구속영장은 결국 ‘기각’됐다.

1천750억원대 횡령·배임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29일 새벽 구속영장이 기각된 뒤 서울 서초동 중앙지검을 떠나고 있다. (연합뉴스)

신동빈 회장 구속영장 기각은 강만수 전 산업은행지주 회장 사례와 맞물려 묘한 정치적 맥락을 형성하고 있다. 강만수 전 회장은 현직에 있을 당시 한국경제 기자 출신의 인사가 운영하는 바이오연료 관련 기업에 투자와 자금지원을 하도록 대우조선해양을 압박하고, 자신의 종친이 운영하는 건설사에 일감을 몰아주도록 강요하며, 한성기업으로부터 갖가지 금품과 접대를 받고, 모 주류업체의 추징금 문제에 개입했다는 의혹 등을 받았다. 그러나 법원은 강만수 전 회장의 구속영장청구에 대해서도 기각 결정을 내렸다. 검찰은 강만수 전 회장 혐의에 대해 ‘권력형 비리’라며 영장을 재청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수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될지는 알 수 없다.

두 사례의 공통점은 ‘정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다. 롯데그룹은 이명박 정권 당시 제2롯데월드 건설 등의 과정에서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구체적으로 지난 7월에는 제2롯데월드 인허가 로비 의혹의 핵심인물로 지목된 장경작 전 호텔롯데 총괄사장이 출국금지 조치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검찰의 수사는 이 의혹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던 걸로 보인다. 강만수 전 회장의 경우도 수사 초기에는 ‘서별관회의’ 등과 관련해 대우조선해양을 둘러싼 정치적 압력의 고리를 규명해낼 수 있는 소재인 걸로 판단됐다. 그러나 결국 수사 결과는 강만수 전 회장의 개인 비리를 들춰내는 정도에 그쳤다.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보수언론은 최근 법원의 구속영장 발부 기준이 높아졌다는 등의 분석을 제시하고 있으나 권력과 검찰의 관계를 놓고 생각할 때 결국 ‘무리한 수사’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이 사건의 정치적 맥락을 고려하면 이런 의심에 더 무게가 실린다. 즉, 권력이 애초부터 너무 무리한 ‘하명수사’를 요구했거나, 검찰이 권력의 요구에 최선을 다해 응하지 않았거나의 문제이다. 지난해 자원외교 비리 수사부터 시작된 검찰의 정치적으로 민감하게 비춰지는 수사 행보가 대중적 관점으로는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은 이런 판단의 한 근거가 된다.

최근 불거진 현직 검사들의 부적절한 행태와 관련 사건들까지 겹쳐지면 앞으로 정권의 검찰 장악력이 필연적으로 약화될 거라는 관측을 해볼 수 있다. 박근혜 정권은 사상 초유의 여소야대 국면을 자초하며 정치적으로 이미 파산한 상태다. 수사기관과 정보기관의 힘을 축으로 간신히 통치 수단을 지키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판국에 검찰의 힘이 빠진다는 것은 결국 ‘레임덕’의 정도가 심해질 거라는 말이 된다.

최근 관료들이 내놓는 현안에 대한 대책들이 무성의해지고 있는 현상 역시 레임덕의 기울기가 더 급해질 거라는 추측을 방증한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오는 30일 정부는 외국계 컨설팅기업이 작성한 보고서를 근거로 해 화학 철강 조선 산업의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 방안을 만드는데 참여했던 외국계 컨설팅기업들은 지난 28일 조선산업을 제외한 부문에 대한 컨설팅 보고서를 공개했는데 이에 대해 시장은 ‘현실성 없는 방안’이라는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물론 구조조정에는 언제나 ‘반발’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반발’의 내용이 무엇인지가 여전히 중요하다. 시장이 지적하는 것은 이 보고서들의 내용이 원론적 진단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논란이 될만한 내용의 다수가 빠져있으며 그나마 제기되는 ‘대안’도 관련 산업에 약이 되기보다는 독이 될 수 있다는 거다. 결국 ‘하느라 할’ 뿐이며 관료들 역시 딱히 구조조정이나 산업재편을 책임지겠다는 의지를 갖는 분위기도 아닌 것이다.

2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해양수산부 국정감사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최은영 유수홀딩스 회장(전 한진해운 회장)이 더불어민주당 박완주 의원 질의에 답하다 무릎을 꿇고 한진해운 관련 사과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관료들의 이런 안이한 대응은 해운업 구조조정과 가계부채 대응 등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해운업 구조조정은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에서 정부가 메스를 들어 컨테이너 선박들이 아직까지 해상에서 표류해야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가계부채 대응은 오히려 또 다른 부동산 부양책으로 둔갑해 문제를 더 키우고 있다. 문제를 제기하는 언론의 날카로운 지적이 쏟아지지만 관료들은 오직 남 탓만을 할 뿐이다. 이런 식이니 ‘반쪽짜리’ 국감에 기업 오너가 출석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퍼포먼스만 화제가 되고 있다.

권력이 이렇게 줄줄 새고 있는데 보수세력은 딴 생각만 하는 분위기다. 보수언론에 실리는 글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드러난다. 29일 동아일보는 박제균 논설위원이 쓴 <권력기관 동요 잠재운 반기문의 힘>이란 글을 지면에 실었다. 관료들의 줄대기가 본격화 되는 집권 4년차에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 등으로 힘이 쏠리는 분위기가 형성됐으나 지난 5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방한해 대선 출마를 시사하자 한 순간에 관료사회의 혼란이 진정됐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그러나 위에서 봤듯 관료들의 ‘줄대기’를 기준으로 한 혼란은 진정됐을지 몰라도 통치의 핵심인 정책을 둘러싼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다. 더군다나 이런 논리라면 반기문 총장이 내년 1월 귀국해 여당의 대권주자로서 ‘검증국면’에 진입한 이후 관료들의 혼란은 오히려 가중될 가능성이 크다. ‘반기문 총장 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동아일보의 글은 그래서 좀 딱해 보인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2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방송기자클럽 초청토론회에서 패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는 29일 방송기자클럽 초청토론회에서 반기문 총장이 대선에 출마하면 안 되고 출마하지도 않을 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메시지는 올해 초 정도에나 적합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오히려 지금 제1야당에 필요한 태도는 반기문 총장을 포함해 여권에서 그 누가 나와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주고 이를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이른바 ‘제3지대론’에 대해서도 거리를 두면서도 동시에 모든 걸 포용하고 포괄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게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일반 국민이든 관료든 저 세력이 나라를 다스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확신을 강하게 주는 게 필요한 시점이다. ‘문재인과 반기문이 싸우면 무난하게 질 수 있다’는 식의 인식이 왜 퍼지고 있는지 스스로 깨달을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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