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의 과잉진압에 의식을 잃은 이후 결국 지난 25일 사망한 백남기 씨의 부검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경찰은 형법상의 문제 등을 들어 부검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있으나 정작 법원이 영장 청구를 각하하면서 경찰이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비판이 확대되고 있다.

보수언론 역시 이런 기류를 파악하였는지 백남기 씨의 사망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하면서도 이의 정치적 이용을 경계하는 분위기다. 예를 들면 중앙일보는 27일 사설에서 “시민단체들도 백씨 사망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될 것”이라면서 “법원이 백씨 부검을 위한 영장을 기각한 것을 견강부회식으로 ‘시신탈취 시도를 사법부가 막았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사태 해결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썼다. 동아일보도 같은 날 사설에서 “법적 다툼이 있는 변사는 부검이 원칙”이라며 “무법 국가가 길 가던 무고한 사람을 죽인 것처럼 오도되는 데 얼마나 많은 국민이 공감할지 의문”이라고 썼다.

보수언론의 이러한 태도는 단적으로 말해 고인을 두 번 모욕하는 것이다. 박근혜 정권은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백남기 씨가 사망에 이르게 됐다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당시 ‘민중총궐기’ 집회의 폭력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당시 집회를 무작정 ‘폭력집회’라고만 표현하는 것은 본질적 해명이 아니다.

‘폭력집회’라고는 하지만 당시 발생한 ‘피해’는 경력과 진압도구, 경찰 버스 등에 집중돼있다. 대형 집회 시마다 경찰이 집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경찰버스로 차로를 막는 등 과잉대응을 반복한다는 지적이 나온 건 이미 오래되었다. 즉 ‘폭력집회’는 거의 언제나 상호적으로 구성된다. 더군다나 그 폭력집회를 백남기 씨가 주도한 것도 아니다. 백남기 씨 스스로가 폭력을 행사하였는가도 불분명하다. 살수차에 의해 진압당하는 동영상에서 그는 단지 살수차 주변에 서 있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아일보가 “자초한 위험은 보호받지 못한다는 법언(法諺)이 있다”는 말이나 인용하는 것은 크게 잘못됐다.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촛불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백남기 대책위 측은 이날 오후 기자회견을 가지고 앞으로 매일 저녁 7시 같은시간에 촛불문화제를 가질 예정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

보수언론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의 뒤에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철학’이 우리 사회에 부재하거나 아주 천박한 형태로 고착화됐다는 사실이 작용한다. 경찰은 ‘물대포’, 그러니까 살수차를 이용한 진압을 상대적으로 안전한 것처럼 주장한다. 이것은 어느 정도는 사실에 가까운데, 오직 살수차를 ‘규정된 방식’으로 운용할 때만 그렇다. 경찰이 규정대로 살수차를 운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간 여러 차례 지적됐다. 직접 분사는 할 수 없고 최루액 등도 정해진 비율로만 섞어야 한다고 규정에 적시돼 있음에도 대형 집회에서는 어김없이 규정 위반이 일어난다.

과연 이를 현장지휘관 또는 살수차 운용자의 어떤 ‘일탈’의 문제로 보아야 할까?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경찰이 강경진압을 묵인 또는 조장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질 수 있을 정도다. 경찰이 늘 ‘안전한’ 진압도구를 마련하지만 강경진압 논란이 늘 불거지는 걸 보면 그렇다. 과거 경찰은 FRP재질의 방패를 사용했는데, 이 당시에도 효과적인 집회 대응을 위해 방패 아랫부분을 아스팔트로 날카롭게 갈아 쓴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이후 등장한 알루미늄 재질 방패의 경우 방패 끝 부분을 고무로 된 몰딩으로 처리하였으나 이를 일부러 벗겨낸 사례가 있다는 의혹 역시 제기되었다. 이후에도 방패의 모서리를 갈아 날카롭게 만들어 과잉진압에 활용한다는 의혹은 상당히 오랫동안 제기됐다. 이 중 일부는 사실로 드러나 법적 처벌을 받는 선례를 남기기도 했다.

즉, 경찰의 시위진압은 거의 언제나 공권력이 규정을 피해 더 효과적이고 강력한 진압 방식을 어떻게 동원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진다. 즉, 사람의 생명보다는 효율성이 먼저이다. 이 ‘생명’에는 물론 일선 현장에서 직접 집회 참가자와 물리적 충돌을 불사해야 하는 의경들의 것도 포함된다. 집회 참가자와 의경들이 입는 피해는 오직 ‘숫자’로 파악되며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피해의 양을 표현하는 ‘숫자’를 최소화하는 것만이 경찰이 집회 대응시에 지켜야 할 제1의 가치다.

우리는 같은 사고방식을 세월호 참사에서도 목도한 바 있다. 여기서도 오직 ‘숫자’가 중요했지 사람의 목숨이 중요한 적이 없다. 세월호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오직 더 많은 이윤을 위해 배를 증개축하고 평형수를 빼내 더 많은 화물을 싣도록 했다. 복원력을 뒷받침하는 장치들이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오로지 돈을 아끼기 위해 그대로 배를 운항하도록 했다.

안타까운 생명들이 물속에 가라앉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월호특조위 청문회를 통해 밝혀진 사실들은 구조당국이 그때 이미 ‘구조 불가능’의 상황을 판단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권력과 국민에게 그러한 사실을 그대로 보여줄 수는 없으니 에어포켓을 유지하겠다거나 하는 핑계로 무언가를 하는 모습을 보여줬을 뿐이다. 이를 통해 정부와 구조당국은 법적 책임을 피하고 재정지출을 최소화 하며 세월호의 선사 측에 최대한의 구상권을 청구할 수 있도록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숫자’이지 ‘생명’이 아니다.

백남기 씨 문제로 돌아와보자. 백남기 씨를 조준해 살수차를 통한 직접 분사를 실제로 실행한 사람이 특별한 ‘악의’를 갖고 행동하였다고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보다는 그가 맡은 업무의 맥락에서 이른바 ‘시위대’가 갖는 의미가 하나의 생명이나 사람이 아닌 ‘숫자’에 불과했었다는 게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살수차를 운용한 사람은 백남기 씨가 이미 쓰러졌는데도 고압의 살수를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숫자’보다 ‘생명’이 우선할 수 있는 정치를 만들지 않는 이상 이런 비극은 계속될 것이다. 이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선 우선 눈앞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백남기 씨를 향한 경찰의 강제부검 시도가 그렇다. 보수언론은 법 조항 등을 들먹이지만 결국 사법부가 경찰 측에 추가 자료를 요청한 것 등을 볼 때 애초의 부검 시도 자체가 무리수였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경찰이 무리수를 둬가면서까지 부검을 하려는 의도는 그들의 표현대로라면 법적 쟁점을 명확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 법적 쟁점을 명확히 한다는 것은 곧 보상이나 배상 등의 재정 지출을 최소화 하겠다는 의미다. 권력과 경찰은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일은 계속 벌어질 것이고 그 때마다 사과와 배상이 이뤄지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정치권이 나서야 한다. 시민사회단체와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등은 백남기 씨 문제에 대한 특검 등을 요구하고 있다. 정국이 경색된 상황에서 이러한 요구를 정부 여당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당면한 문제를 결국 해결하는 것은 정치의 역할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향후 한국 사회의 미래는 누가 효율이 아닌 생명이 우선하는 정치를 만들고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달렸다. 이 임무를 외면하는 정치세력은 이 나라를 책임지겠다며 나설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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