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무기한 단식농성에 나섰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사퇴할 때까지 농성을 지속하겠다고 한다. 동시에 새누리당은 정세균 의장 사퇴 촉구를 위한 릴레이 1인 시위에도 나선다고 한다. 구체적인 순서까지 정했는데 김무성 전 대표, 정진석 원내대표, 원유철 전 원내대표, 조원진 최고위원, 심재철 국회부의장 등 순이다. 친박과 비박의 구분을 넘어 전현직 주요 지도부가 모두 나서는 모양새다.

여러 정치적 비판이 제기될 수 있겠지만, 새누리당이 ‘국회의장실 점거’에 이어 ‘단식농성’이라는 방법을 택한 것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그간 새누리당과 보수언론은 시민사회단체와 야당의 여러 정치적 행위를 ‘극단적인 운동권식 투쟁 전술’이라며 비난해왔다. 이제 자신들이 그런 처지가 된 것을 지지자들에게 무어라 설명할지 궁금하기는 하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냐’고 말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이 정국을 그 한 마디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새누리당의 논리에 정치적 냉소주의라는 배경이 깔려있는데, 이를 직시하지 않으면 같은 오류를 서로 반복하는 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가 26일 오전 국회 예결위회의장에서 열린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의 해임건의안 의결과 관련된 긴급 의원총회를 마치고 나와 정세균 의장에게 항의하는 1인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는 1인 시위에 나선 자리에 두 가지 내용이 적힌 팻말을 들었다. 하나는 ‘의회주의 파괴자 정세균은 물러나라’는 구호가 적혀있고 또 하나에는 ‘세월호나 어버이연합 둘 중에 하나 내놓으라는 데 안 내놔…그래서 그냥 맨입으로…그래서 그냥은 안 되는 거지!’라는 정세균 의장의 발언 문구가 써있다. 즉, 정세균 의장이 야당 요구의 관철을 위해 본회의를 편파적으로 진행해 의회주의를 파괴했다는 주장인 셈이다.

정세균 의장의 행위 배후에 ‘사익 추구’가 있다는 인식은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의 다른 발언으로도 드러난다. 이정현 대표는 25일 최고위원회에서 “대권병에 환장한 사람도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고 발언했다. ‘대권병’이라는 단어는 정세균 의장의 정기국회 개회사에 대해서도 나왔었다. 당시에도 이정현 대표는 “중증의 대권병이 아니고서는 헌정 사상 초유의 이러한 도발은 있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즉, 정세균 의장의 ‘편파적 국회운영’은 야권의 ‘대권주자’가 되기 위함이라는 거다.

그러나 문제의식이 본질에 가닿기 위해서는 새누리당이 말하는 ‘국회의장의 정치적 중립’이 얼마나 허무한 얘기인지를 다시 짚을 수밖에 없다. 가령 이명박 정부의 경우 대통령이 직접 국회의장에게 전화를 해 법안이나 예산안 통과에 대해 직접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예산안 등을 날치기 처리 할 때에는 무소속인 국회의장의 정치적 부담을 덜기 위해 여당 소속의 국회부의장이 대신 의사봉을 휘두르기도 했다. 당시 주로 의사봉을 잡았던 사람이 정의화 전 국회의장이다. 이 경우 김형오 당시 국회의장이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고 평가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잘 봐줘도 ‘눈 가리고 아웅’이다.

허망한 국회의장의 정치적 중립을 말할 게 아니라 국회의 위상과 역할을 논해야 한다. 현재로서는 여당이 국회 내에서 행정부를 대변할 수밖에 없다. 이정현 대표 체제와 ‘여소야대’라는 국회의 현실이 그런 상황을 조장하고 있다. 국회는 행정부 독주에 맞서 입법부의 역할을 분명히 해야 하고, 필요한 경우 정부를 견제해야 한다. 국정감사나 대정부질문 등은 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26일 오후 국회 당 대표실에서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의 해임건의안 의결에 항의하는 단식 농성을 벌이고 있다. 방에는 정세균 국회의장의 녹취록을 틀어놓은 TV와 조그마한 책상, 침구류만 놓여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새누리당은 정부를 대변하며 이러한 국회 고유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있다. 대정부질문은 김재수 장관 해임결의안 표결 저지를 위해 ‘필리밥스터’로 활용했고 국정감사를 보이콧 했다. 대정부질문, 김재수 장관 해임결의안 표결, 국정감사는 모두 입법부가 아니라 행정부에 부담스러운 것들이다. 새누리당이 선택한 것은 입법부의 권리 행사가 아니라 행정부 보호이다. 그러니까 의회주의의 파괴자는 정세균 의장이 아니라 새누리당 자신이다. 오히려 국회의장은 국회 내의 균형이 아니라 입법과 행정의 균형을 위해서도 움직여야 한다.

이런 본질적 문제를 무시하고 ‘대권병’이나 논하는 것은 새누리당과 이정현 대표가 정치를 진지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정현 대표의 정치적 냉소 부추기기는 지난 교섭단체대표 연설에서도 나왔다.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에 대한 해임 요구를 “야당이 사실상 대선불복 형태의 국정 반대를 하고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문제제기의 핵심이 무엇인지는 온데간데 없고 오로지 상대의 ‘의도’만을 말하며 침소봉대 한다. 이것은 대통령의 특근이 ‘공작’의 차원에서 ‘프레임 전환’을 할 때에나 필요한 것이다. 집권당의 대표가 말할 진지한 정치의 내용이 못 된다.

더 큰 일은 이런 태도가 박근혜 정권의 고질적 문제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그간 제기되는 모든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의도’의 문제로 뒤바꿔왔다. 청와대의 인식에 의하면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이 쟁점화된 것은 대선 결과에 불복하고자 하는 야당의 ‘의도’에 의한 것이며, 청와대 문건유출 사건의 배후에는 조응천 당시 공직기강비서관의 ‘의도’가 작용했고, 우병우 민정수석에 대한 문제제기는 ‘부패 기득권 세력’의 ‘의도’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유승민 의원이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 나서 “증세없는 복지는 불가능”이라고 주장한 것에도 어떤 ‘의도’가 작용한 게 분명했다.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은 ‘배신의 정치’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정권과 집권 여당의 이런 태도는 대중의 정치적 냉소주의를 부추기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기만적 통치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작용한다. 즉, ‘남들이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도 이에 맞서기 위해 기만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박근혜 대통령의 퇴임 이후 대비책으로 평가되는 미르·K스포츠재단 문제는 결국 어떤 해명도 없이 전경련이 뒤집어쓰기로 했다. 24일 이승철 전경련 상근부회장이 밝힌 바에 따르면 전경련은 두 재단들에 대한 이사장 교체, 명칭 교체, 사무실 위치 변경 등의 조치를 취할 예정이다.

그러나 애초에 제기된 의혹, 즉 안종범 정책조정수석이 전경련을 시켜 기업들에게 돈을 모으게 했다는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청와대와 전경련은 그저 대놓고 ‘눈 가리고 아웅’을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이들이 당당하게 이럴 수 있는 것은 애초에 이 의혹이 ‘부패 기득권 세력’에 해당하는 TV조선으로부터 제기된 것이기 때문일 게다. 이제 새누리당의 주요 지지층이 어떤 내용의 메시지를 카카오톡 등 스마트폰 메신저로 돌려 볼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이들은 김영오 씨가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할 때에도 ‘야당 공천을 받기 위한 것’이라며 ‘의도’를 날조해 매도했다.

이런 식의 ‘공작’이 당장은 정권과 여당에 도움이 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기성 정치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기성 정치를 위협하는 걸 보라. 도널드 트럼프가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부정직한 힐러리(crooked Hillary)’이다. 힐러리 클린턴의 정책이 아니라 ‘의도’가 문제라는 거다. 새누리당이 이제 도널드 트럼프식 정치를 본격적으로 해보겠다는 생각을 가진 게 아니라면 기만술에 가까운 단식농성이나 1인시위는 그만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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