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내기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치팀 기자로 일하며 이따금 내기를 거는 경우가 생겼다. 정치 현안을 놓고 가까운 기자들이나 정치권 안팎의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취재 내용을 근거로 개인적 전망을 내놓을 때가 있다. 이 때 서로의 주장이 팽팽하게 엇갈리게 되면 종종 가벼운 내기를 걸곤 하는 것이다. 뭐, 내기라 해도 고작 점심값 정도를 걸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숱한 내기에서 나는 더러 이겼고, 올해 들어서만 벌써 두 번을 졌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대선 출마를 강행할 경우, 내기에서의 세 번째 패배로 기록될 것 같다. 지난 달 하순 정치권의 한 관계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이 전 총재의 출마설이 나왔다. 지금이라면 ‘출마한다’에 점심을 걸겠지만, 그때는 반대였다.

▲ 경향신문 11월5일자 3면.
지난 주말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같은 성적표는 어쩌면 정치부 기자에게 ‘굴욕’에 해당하는 결과일 수도 있다. 전망이나 분석이 빗나간 셈이라고도 할 수 있고, 이를 근거로 자질 부족을 탓한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난 세 차례의 내기 패배에 대한 원인을 분석해보면서 나름의 이유도 있다.

첫 번째 패배는 지난 3월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한나라당을 탈당할 때였다. 이미 지난해 말부터 손 전 지사의 한나라당 탈당설은 정가에 떠돌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손 전 지사가 탈당설을 통해 최대한 협상력을 끌어올릴 수는 있어도, 실제로 탈당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봤다.

이를 놓고 당시 언론계 한 선배와 점심 내기를 했다. 사실 탈당설에 대해서는 취재로 확인이 가능하지만 손 전 지사가 최종적으로 어떤 결정을 내릴지 본인의 진심을 허심탄회하게 들어보지 않은 이상, 판단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점심을 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살아온 과거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손 전 지사는 14년 동안 한나라당에 몸담고 있는 동안 성골 가운데 성골로 대접받아왔다. 손 전 지사는 한나라당에서 국회의원을 지냈고, 보건복지부 장관을 경험했고, 경기지사로 일했다. 그런 손 전 지사가 한나라당을 뛰쳐나올 것이라고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손 전 지사 본인도 “손학규의 입을 보지 말고 살아온 길을 봐라. 나는 지금껏 한나라당을 지켜온 기둥이자 주인, 미래다”, 이렇게 말했다. 손 전 지사가 살아온 길을 보고 판단했기 때문에 나는 점심을 사야 했다.

두 번째 패배는 대통합민주신당 본경선 때였다. 유시민 의원은 경선 기간 내내 여기저기서 이해찬 전 총리와의 친노 후보 단일화에 나서라는 압박을 심하게 받았다. 그래도 유 의원은 꿋꿋하게 버텼다. 경선 직전 이뤄진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는 극심한 단일화 압박에 대해 이렇게 밝히기도 했다.

“우리는 무조건 제주 울산 강원 충북까지 해봐야 비로소 우리의 소망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이 간극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뛰다가 빠져 죽을지, 그래서 돌아와야 하는지, 우리는 판단해야 한다.”

이 말을 하면서 유 의원의 눈시울은 붉어졌고 목소리는 떨렸다. 유시민 의원이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이냐를 놓고 가까운 선배와 이야기를 하던 중, 나는 적어도 4연전 이상 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선배는 믿는 구석이 있었든지 첫날 결과가 유 의원의 사퇴 여부를 결정지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인의 눈물을 믿었기 때문에 나는 역시 점심을 사야 했다.

▲ 한겨레 11월5일자 5면.
그리고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출마설이다. 이 전 총재의 대선 출마 이야기 역시 정가에서는 올초부터 꾸준히 흘러나왔다. 여권의 후보가 결정되면 각종 의혹에 시달리고 있는 이명박 후보가 흔들릴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이회창 후보가 대타로 등장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 전 총재의 출마설은 대부분의 기자들, 그리고 심지어 한나라당 관계자들에게도 순간적 호기심의 대상이었을 뿐, 진지한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10월 말 한나라당 관계자와 이 전 총재 이야기를 하던 중, 이 관계자가 뜬금없이 ‘이회창 출마설’을 주장할 때만 해도, 나는 여전히 출마하지 않을 것이란 쪽에 걸었다. 이 전 총재 본인 역시 지난 1월 “내 처지에서 대선을 놓고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는 것은 오만한 생각이다. 현실 정치에 참여할 생각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서 정치에 선을 그었다. 이같은 이 전 총재의 말을 믿었기 때문에 나는 올해 세 번째 내기에서의 패배를 앞두고 있다.

이번 대선은 내가 정치팀 기자로 맞는 첫 번째 대선이다. 앞으로 대선까지는 한 달하고도 절반 정도가 더 남았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가 이달 초 “한국의 대통령 선거는 막판까지 변수가 많고 콤팩트하게 진행돼 매우 흥미롭다”고 말한 것처럼 남은 기간에 어떤 변수가 돌출할지 모르겠다.

그때 정치부 기자는 무엇을 판단의 잣대로 삼아야 할까. 정치인이 살아온 길일까, 아니면 눈물에 담긴 진정성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오래 전 ‘정치인이 하는 말은 반만 믿어라’라고 했던 정치팀 선배의 충고는 분명 변치않는 명언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최성진은 현재 한겨레21 정치팀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한때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방송작가 생활을 경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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