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금융노조의 파업을 두고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은행장들을 모아놓고 조합원들이 파업에 참여하지 말도록 설득할 것을 강권하는가 하면 대통령이 직접 공공 부문 및 은행권 노동자들을 특정해 비난하였기 때문이다.

정부는 성과연봉제 도입을 마치 합리적 임금체계를 안착시키기 위한 것인 양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노조 측의 시각은 다르다. 성과연봉제란 정확한 성과의 측정이 가능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데 정부와 기업이 그런 믿음을 전혀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과를 측정한다는 명분으로 노조 주요 간부 등 정치적 반대자들을 주요 직책에서 ‘찍어 내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노동개혁의 주요 의제가 저성과자에 대한 쉬운해고, 임금피크제 확대 도입 등인 것을 감안하면 불안감은 더 커진다.

호봉제를 핵심으로 한 임금체계가 최종적 대안이냐 하는 것에는 이견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회가 최소한의 신뢰를 담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에게만 위험과 부담을 강요하는 것은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일이 될 뿐인 것은 분명하다. 기득권이 사회적 신뢰의 증진을 위해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국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박근혜 대통령이 22일 청와대에서 열린 노인의 날 기념 전국 어르신들과의 오찬행사에서 밝은 표정으로 앉아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은 22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무책임한 폭로 정치’를 비판했다. 이는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불리는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 씨가 미르 재단과 K스포츠 재단의 설립과 운영을 주도하였다는 의혹이 불거지고 있는 것에 대한 발언으로 보인다. 전경련이 총대를 메고 재단법인을 만들어 기업들의 자발적(?) 기부를 받아 기금을 조성하는 과정이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이뤄졌기 때문에 의혹은 일파만파다.

대기업들이 군말 없이 거액을 내놓은 것, 재단 사무실의 위치가 박근혜 대통령의 사저와 가깝다는 점, 이후 활동 계획 등을 고려하면 이 재단이 대통령의 퇴임 이후를 대비한 것이라는 추측에 강하게 힘이 실린다. 이 두 개의 재단을 활용한 활동으로 전직 대통령이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는데 성공할 경우 일종의 ‘이중권력’ 상태가 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가져볼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직 젊기 때문에 퇴임 이후 정치 행보를 둘러싼 논란은 언제든지 불거질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두 개의 재단에 대해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개인적 정치적 경제적 이득의 확대를 위해 권력으로 제도를 무력화시킨 사례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윗물이 이런데 아랫물이 맑겠는가.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가 연루된 인턴 채용 비리 의혹이 새삼 불거지고 있는 상황도 이런 의구심에 불을 붙인다. 박철규 전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은 21일 공판에서 외압이 없었다는 그간의 입장을 뒤집고 2013년 8월 국회 원내대표실에서 최경환 전 부총리를 만나 그가 추천한 인사를 채용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최경환 전 부총리 지역 사무소의 인턴 출신인 이 사람은 채용기준에 턱없이 미달하는 소양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배려와 기준 변경을 통하여 최종 면접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면접 역시 스스로의 힘으로 통과하지 못하자 최경환 전 부총리가 직접 나서 채용을 시켜줬다는 거다.

박철규 전 이사장이 기존 입장을 뒤집고 이런 폭로를 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박철규 이사장은 검찰 조사가 진행되던 지난 1월 자신이 지쳐 있었고 얘기해봐야 무엇이 바뀌겠는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해명했다. 실제로 검찰은 지난해 말 최경환 전 부총리 외압 의혹에 대해 서면진술서를 받는 걸로 수사를 종결하고 ‘무혐의 처리’했다. 이른바 ‘친박 실세’와 관련된 의혹이므로 이 정권 하에서 아무리 말해봐야 소용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할법 하다. 다음 재판에 출석할 예정인 임채운 현 이사장이 했다는 말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의혹이 불거지자 인사담당 직원에게 “최가 힘이 있어야 우리를 지켜주고, 최 부총리가 살아야 너도 (살고), 최경환이가 힘을 가지면 되고”라는 말한 걸로 알려졌다.

새누리당 서청원 의원과 최경환 의원이 21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신중하게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아마 최경환 전 부총리가 계속 친박 실세로서의 영향력을 유지했더라면 임채운 이사장의 생각대로 상황이 흘러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가에서는 최경환 전 부총리의 힘이 실제로 예전만 못하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진박감별사’를 자처해 표가 떨어지는데 일조해 당내의 인심을 잃은 데다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과의 알력설까지 불거지고 있기 때문이다. 박철규 전 이사장의 입장 변화는 이런 상황 속에서 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최경환 전 부총리가 경제사령탑을 맡았던 시기 노동개혁과 공공부문 개혁에 강한 목소리를 내왔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허망한 기분마저 드는 게 사실이다. 자신의 지역사무소에서 일한 인턴까지 이렇게 꼼꼼하게 챙길 정도였는데 더 중요한 인사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편의를 봐주었겠는가. 한때 관가에서는 최경환 전 부총리가 전임인 현오석 전 부총리 시절 해결하지 못한 ‘인사적체’를 해소해 줬다는 이유로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실제 최경환 전 부총리가 힘을 갖고 있던 시기 기획재정부 출신 인사들이 타 부처까지 진출하는 일이 많아졌다. 과연 이러한 인사가 성과를 공정하게 평가한 결과였는지 의심스럽다. 오히려 ‘정무적 판단’이 작용한 경우가 훨씬 많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법을 실행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법을 어기가 자기 잇속을 챙기는 데만 혈안이 돼있는 사회에선 모두가 각자 살아남는 게 우선이고 합리적 체제를 만드는 건 뒷전이다. 성과연봉제는 어떤 전제가 뒷받침 된다면 합리적 임금체계로 효력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전제가 전무한 상황에서는 성과연봉제의 적용 대상들도 어떻게든 살아남는 길을 찾아야지 명분을 믿을 일이 아니다. 각자 상황이 뻔한데 무슨 대화가 되고 타협이 되는가.

나라의 모든 부분과 요소에서들 그러니 앞으로가 큰일이다. 박인용 국민안전처 장관은 미흡한 지진 대책과 매뉴얼의 부재를 문제삼는 국회의 추궁에 “매뉴얼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활성단층 상에 핵발전소가 존재하는 건 위험하지 않느냐는 질문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답했다. 재난문자 발송과 홈페이지 접속불가 사태 등에 대해선 통신사와 지자체를 탓했다. 단지 어법의 문제가 아니다. 국민안전을 책임진다는 주무부처 장관이 국민안전을 지킬 의사가 전혀 없다는 걸 스스로 실토한 거다. 국민안전을 지킬 의사가 없는 국민안전처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애초부터 정치적 핑계와 ‘자리’의 문제였던 거다.

자기가 애초에 져야 할 책임은 지지 않고 다들 딴소리만 하니 이 정권에서 중요한 게 ‘충성심’ 외에 무엇이 있는지 의문이다. 대통령이 숱한 의혹에도 자기가 믿는 우병우, 안종범 수석 등 참모와 최순실 씨 등의 측근들을 감싸는 걸 보면 충성심이 절대적 가치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거시적 현상은 미시적으로도 반복되므로 이런 원리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이미 진리로 관철되고 있다. 차라리 솔직하게 성과연봉제를 충성연봉제로 바꾸는 게 어떨까 한다. 오로지 지도자에 대한 충성이 유일한 판단 기준이었던 시대는 중세에도 그리 길지 않았다. 오늘날엔 내전이 계속되는 국가 또는 북한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렇듯 민족적 동질성이 확고한데 남북이 왜 총부리를 맞대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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