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에서 문재인 씨 말고 대선경선을 준비하는 분이 몇 더 있다. 그분들은 아마도 2002년 노무현 후보의 기적 같은 역전극을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본인들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라면서. 친문 지도부의 출현 이후에도 이런 기대가 줄지 않는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의 진실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보통 승자의 기록은 왕왕 신화가 되면서 사실이 비틀어진다. 2002년 경선이 그렇다.

2002년 민주당 광주지역 국민경선 1위 확정후 어린이를 안아들고 손을 흔드는 당시 노무현 경선후보(노무현사료관)

'1%의 지지율을 딛고 이겼다'는 말이 대표적이다. 노무현 후보는 2001년 – 지금처럼 대선을 1년 넘게 남긴 시점이다 - 이미 민주당 대선후보 적합도에서 평균 15% 정도의 지지를 받았다. 이인제가 25% 전후고 나머지 후보는 한 자릿수에 불과했다. 이인제 후보에는 밀렸지만 당내에서는 확고부동한 2위 자리를 경선 시작하기 전까지 근 1년간 유지했다. 그 뿐인가. 2002년 첫 경선인 제주 경선을 앞두고 3월 5일 조선일보와 갤럽이 제주의 당원 및 국민선거인단을 대상으로 실시한 지지율 조사를 보면 이인제 20.8%, 노무현 19.8%, 한화갑 14.6%, 정동영 14.0%다. 같은 기관이 3월 11일 광주선거인단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이인제 28.1%, 노무현 26.3%, 한화갑 14.3%이다. 이미 노무현 후보는 이인제 후보와 선두를 다투는 자리에 올라있었다. 1%의 기적이란 건 없다. 지금 과연 더민주에 그런 수준의 지지를 확보한 후보가 있는가 묻고 싶다.

또 하나의 신화는 국민참여경선이다. 당원이 아닌 일반 국민이 선거인단으로 참여하는 국민참여경선이 경선의 역동성을 높인 것은 맞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의 승리를 결정한 것은 국민선거인단이 아니라 당원선거인단이다. 특히 경선국면을 바꿔놓은 광주에서 그랬다. 국민선거인단은 당원선거인단에 비해 투표율이 낮았다. 각 후보 진영이 동원한 사람들이라 몰표가 나올 수도 없었다. 이에 비해 광주의 당원선거인단은 투표율도 높았고, 지구당위원장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 내린 전략적 판단에 따라 본선에서 이길 것으로 보이는 후보에게 투표했다. 그렇지 않다면 자타가 1등을 예견했던 한화갑 후보가 3등에 그치고, 노무현 후보가 그 많은 표를 얻은 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노무현 후보의 당내 기반과 세력분포에 대한 판단도 사실과 다르다. 주류인 동교동계가 다른 후보를 밀었지만 주류라고 해서 지금 친문처럼 당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동교동계의 일부는 갈라져서 한화갑 후보를 밀었다. 노무현 후보는 비록 비주류지만 나름대로 상당한 당내 기반이 있었다. 이전에도 전당대회에 두 차례나 출마해 비교적 높은 득표율로 부총재에 선출되었다. 국민참여경선제가 도입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오히려 경선이 더 힘들어졌다고 낙담할만큼 당 대의원들의 판단 – 국민참여경선 도입 전에 후보를 결정하던 – 에 기대를 갖고 있었다. 자신이 민주당의 적통이므로 본선 경쟁력이 더 높다는 것을 입증한다면 무엇보다 김심이 작동할 것이고, 이길 수 있는 후보를 선택하는 대의원들의 전략적 지혜가 발휘될 것으로 믿은 것이다. 지금 더민주의 세력분포는 과거 어느 때보다 심하게 편중되어 있고 도전자들 중에서 노무현 후보만한 당내 기반을 가진 후보가 없다.

국민참여경선이 노무현 후보의 승리에 더 크게 기여한 것은 국민선거인단보다 처음으로 채택한 순회경선 방식이다. 미국의 예비선거에서 보듯 순회경선은 도전자들에게 기회다. 돈과 조직과 지명도가 약한 도전자들은 첫 예비선거 주(state)인 뉴햄프셔에 물량을 쏟아 부어 성과를 내고, 여기서 다음 경선을 끌고나갈 동력을 확보한다. 노무현 후보의 뉴햄프셔는 두 번째 경선지역인 울산이었다. 2002년 3월 11일, 노무현 후보는 울산경선에서 1등을 했고, 그 영향으로 3월 14일 문화일보-TNS 조사에서 처음으로 이회창 후보와 가상대결에서 이기는 –오차범위 안이지만– 결과를 얻었고, 광주가 화답했고, 그후로는 모든 것이 파죽지세였다.

2007년 경선에선 친노와 척을 진 정동영 후보가 승리한다. 당 안팎의 친노세럭은 '동원경선' 운운하면서 국민참여경선을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2007년에도 아주 작은 비중을 실험적으로 도입했던 이른바 모바일 선거를 그 대안으로 주장했고 전당대회를 통해 점차 확대해 나갔다. 마침내 모바일 선거는 2012년 경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손학규 후보를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손학규 후보는 순회경선에서 더 많은 표를 얻고도 모바일 투표와의 합계에서 밀렸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모바일 투표는 안정성 문제, 인기투표화 되는 경향, 표의 등가성 훼손 등 그 자체로 문제가 많지만 더 결정적인 문제는 순회경선을 통한 드라마의 탄생을 원천 차단하는 것이다. 순회경선을 통해 얻은 표보다 사전에 휴대전화를 통해 집계한 표가 더 많기 때문이다. 집계결과를 순회경선이 끝났을 때 개봉해 합산하면 그동안의 순회경선은 무의미해지기 십상이다. 지금의 경선방식은 말만 순회경선이지 실제로는 결과를 그때그때 확인할 수 없는 깜깜이 경선이고, 경선 초기에 어느 도전자가 의외의 성과를 내도 나머지 선거인단의 판단에 미치는 영향이 작으며, 결국 이미 앞선 선두주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해진다.

혹자는 말한다. '지금 경선룰 싸움을 벌이면 다 망한다. 비전과 정책으로 승부해야 한다.' 옳은 말이다. 허나 나이브하다. 옛날이야기 하나로 필자의 생각을 대신한다.

노무현 후보 캠프의 일원으로 민주당 경선을 준비할 때다. 2001년 말, 민주당혁신위원회는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당원선거인단과 국민참여선거인단의 비중을 5:5로 하는 국민참여경선제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그해 말에 위원회가 당원 국민 비율을 7:3인가 8:2로 바꾸려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노무현 후보에게 보고했지만 별 대응 없이 지나갔다. 새해 첫 출근해서 둘러앉은 캠프회의에서 노무현 후보가 폭탄선언을 했다. '이미 정해진 경선룰에 손대면 나는 출마 포기한다'는 입장을 밝힐 수 있도록 오전 중 기자들을 소집해 달라는 것이다. 튀는 처신으로 비칠까 우려한 사람들이 당내 개혁파들을 믿어보자며 만류했지만 노 후보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할 수없이 필자와 공보특보가 입을 맞춰서 새해 첫날이라 기자들이 별로 안 나왔다 거짓말하고 기자회견을 무산시켰다. 이걸 눈치챈 노 후보는 '당신들은 정치를 잘 모른다', '정치는 모든 걸 거는 거다'라는 말로 우리 둘을 질책했다. 경선룰이 모든 걸 만큼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경선룰이 원안대로 유지되었으니 결과적으로 필자의 의견이 맞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노 후보의 정치를 대하는 태도와 승부를 거는 방식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더민주의 대선주자들 가운데 이런 승부사가 보이지 않는다. 과연 제대로 된 역동적인 경선을 기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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