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를 흔히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부른다. 광고학을 전공하거나 광고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우쭐한 메타포일 것이다. 제작자라면 광고의 ‘표현’이 꽃만큼 탁월하다는 미학적 자부심을 느낄 만도 하다. 하지만 ‘꽃’에는 반드시 관상(觀賞)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꽃은 식물의 생식기관이다. 광고가 자본주의의 꽃이면 자본주의는 광고의 나무 기둥이거나 뿌리가 된다. 광고는 자본주의를 번식시킨다. 광고는 ‘자본주의의 성기’이기도 하다.

어쨌든, 광고의 표현 전략은 치밀하고, 표현 결과는 탁월하다. ‘설득’과 관련한 모든 지식과 감각을 총동원해 한 장의 사진이나 15~30초짜리 영상, 몇마디의 카피와 음향/음악 따위 표현 장치들을 재구성해, 보는 이의 소비욕망을 ‘창조’하려는, 고집적(高集積) 기획 표현물이 바로 광고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쩐지 시대적 감각의 첨단에 선 댄디의 이미지를 갖고 있을 것 같다. (실제 내가 알고 있는 광고쟁이들은 이런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지만….)

한국사회가 광고에 쏟아붓는 돈은 한 해 10조원 가까이 된다.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가 집계한 2007년 국내 전체 광고시장 규모는 9.43조원이었다. 국내총생산(GDP)의 1%를 조금 넘는다. 광고산업은 그 스스로 자본주의 시장의 주요한 일원인 셈이다. 방송과 신문, 수많은 인터넷 매체들의 밥줄도 모두 여기에 달려 있다. 경기 침체로 광고시장도 크게 줄어 다들 아우성이지만, 이 물에서도 예외는 있으니 김연아는 피겨 스케이팅으로 이룬 성취보다 더 큰 대박을 지금 광고시장에서 터뜨리고 있다.

하지만 광고의 기원은 소박(?)하기만 하다. 도망간 노예를 찾아주면 사례금을 지급하겠다는 내용의 고대 이집트 광고다. 광고의 기원이 하필 억압/착취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나처럼 광고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에겐 에덴의 원죄 같은 숙명을 연상시킨다. 얼마 전 서울 종로의 피맛골 언저리에서는 광고의 기원을 엿보게 하는, 그러나 정치적 맥락은 전혀 다른 옥외 광고물들의 파노라마가 연출됐다. 이 일대 음식점들이 내건 업소 이전 광고였다.

피맛골 일대는 지금 거대한 공사판이다. 세입자들이 무더기로 목숨을 잃은 용산 일대 못지 않게 동시다발적으로 도심재개발 사업이 벌어지고 있다. 골목골목 꼬막 딱지처럼 붙어 있던 피맛골 맛집들 지도가 한꺼번에 헝클어졌다. 여기에도 수혜자들은 있다. 최대 수혜자는 <미디어스> 사무실이 입주해 있는 주상 오피스 빌딩이다. 분양이 안 돼 텅텅 비어 있던 상가시설들이 꽉 들어차 순식간에 푸드타워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상인들은 임대료가 비싸다고 아우성이다. 내가 대한민국 최고의 족발집으로 치는 경원집은 그나마 먼 곳으로 가고 말았다.

이들 광고는 대부분 이번주 들어 일시에 내걸렸다.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철거 현장의 방진막에 철거된 업소들의 이전 광고가 나붙은 건 아이러니처럼 보이기도 하고, 정치적 맥락의 기호로도 읽힌다. 철거 현장의 폐허를 너덜너덜한 방진막이 남루하게 가리고 있고, 그 위에 ‘먹고사니즘’의 단순하면서도 적나라한 퍼포먼스가 펼쳐진 것이다. 나는 이들 광고가 깃발의 소리없는 아우성처럼 보이고, 들렸다.

광고가 꽃이면 못난 광고, 호박꽃 같은 광고도 꽃이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촛불집회를 폄하하는 뜻으로 ‘깃발집회’라고 불렀다지만, 이 소리없는 아우성은 처참하게 아름답지 않은가. 이 사진들은 지난 13일 찍은 것이다. 이번주 들어 일시에 내걸렸던 깃발들은 사진을 찍고 난 이튿날 다시 일시에 사라졌다. 아마도 자발적인 철거는 아니었을 것이다, 모든 철거가 그렇듯. 그러나 이들 깃발이 철거된 자리에도 꽃은 피어 있다. 무화과는 꽃이 없는 나무가 아니라 속으로 꽃을 피우는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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