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구멍으로 호박씨 까다

‘밑구멍으로 호박씨 깐다’는 속담이 있다. 항문이나 여자의 음부를 일컫는 밑구멍이라는 상스러운 단어 때문에 ‘뒤로 호박씨 깐다’거나 ‘뒤에서 호박씨 깐다’로 통용되는 이 속담은 겉으로는 점잖고 의젓하나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엉뚱한 짓을 하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작년 9월26일 이용훈 대법원장은 사법 60주년 기념사에서 사법부는 건국 후 온갖 역경 속에서 사법권의 독립을 확보하고 법의 지배를 확립하는 데 힘쓴 결과 사법부 독립에 관한 한 세계 어느 나라와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은 수준에 이르렀다고 자찬했다. 그리고 비록 권위주의 체제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 판결 등 헌법의 기본가치나 절차적 정의에 맞지 않는 판결을 선고하기도 했다며 지난 60년을 거울삼아 새로운 60년 선진사법의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겠다고 공언했다.

그렇게 대법원장이 사법부의 독립과 선진사법에 대한 자부심에 들떠 기념사를 쏟아내고 있을 무렵 당시 서울중앙지방법원장이던 신영철 대법관은 촛불사건을 특정 재판부에 일괄배당하는가 하면 판사들에게 ‘대법원장님의 뜻이다’는 은근한 협박을 곁들여 위헌제청을 자제하라거나 선고를 뒤로 미루지 말라거나 유죄판결을 은근히 종용하는 발언을 쏟아내고 있었다. 알고 보니 신 대법관은 뒤에서 호박씨 까고 있었던 것이다.

▲ 신영철 대법관 ⓒ오마이뉴스
염치 있다? 염치 없다?

염치(廉恥)라는 단어도 있다. ‘결백하고 정직하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라는 뜻의 이 단어는 ‘염치 있다’ 보다는 ‘염치없다’는 표현에 주로 사용된다.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라고 말할 때도 염치없는 소행을 보고 하는 말이니 아무래도 염치 있는 일보다는 염치없는 일이 일상인가 보다.

어제 오전 대법원장은 그 동안 세간에 오르던 이른바 신 대법관 사태에 대해 ‘신 대법관이 재판 내용이나 진행에 관여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며 엄중경고하면서도 신 대법관을 징계위에 회부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고는 “신 대법관의 행동으로 인해 법관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고 국민의 신뢰가 손상되는 결과가 초래된 점에 대해 유감”이라며 “이번 일을 계기로 법관의 재판상 독립이 보장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아, 고작 요거 보여주려고 법원행정처가 진상조사를 하니, 법관 워크숍을 열어 의견을 수렴하니, 징계위원회도 아닌 공직자윤리위원회를 열어 심의를 한다며 그 동안 2달이 넘도록 시간을 끌었던가? 근간에, 그리고 바로 어제와 오늘 나라의 최고법원을 이끄는 수장의 모습을 보면서 ‘염치없다’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허무개그라는 혹자의 비난이 무리가 아니다.

다른 듯 비슷한 두 사건-신 대법관 사태와 용산공판

사법부가 겪고 있는 진통은 단지 고위법관이 다른 법관의 재판에 감 놔라 배 놔라 한 데서만 비롯된 게 아니다. 좀 더 크게 보면 신 대법관 사태가 다시 한번 국민의 뇌리에 각인을 한 셈이지만 이번 사태가 아니었더라도 이미 상당수 국민이 재판의 공정성을 믿지 않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신 대법관 사태 같은 것이 없었더라면 국민은 재판에 신뢰를 보냈을 것이고, 앞으로도 보낼 것이라 장담할 수 있는가?

신 대법관 사태 때문에 관심사에서 멀어져 있지만 용산철거민들에 대한 공판은 왜 국민들이 사법부를 신뢰하지 못하는지, 왜 판사가, 그리고 법원이 강한 자에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하다고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다. 신 대법관 사태나 용산공판의 파행은 오늘날 우리 법원이 담지하고 있는 헌법의 가치와 정의관념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익히 알려진 대로 용산공판은 검사가 보관하고 있는 1만여 쪽의 수사기록 중 경찰지휘부와 특공대원들에 관련된 약 3천 쪽을 변호인에게 열람등사해 주라고 법원이 명령하였지만 검찰이 이를 거부하자 변호인들이 검찰이 짜맞추기 수사결과만으로 기소하고서 수사기록까지 은닉하여 실체적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며 변론을 거부함으로써 파행을 겪고 있다.

▲ 서울지검 정병두 1차장 검사가 지난 2월 9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대회의실에서 '용산철거민 참사'에 대해 수사결과를 발표한 뒤 농성망루 모형을 보여주며 설명을 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권우성
문제는 변호인들이 원하는 수사기록을 검토할 수 있어야 공정한 재판이 가능하고 검사는 피고인들에게 유리한 증거를 제출할 의무가 있다는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의 결정을 ‘내부방침’을 이유로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는 검찰의 편파적 태도만이 아니다. 정작 이 사건의 재판부가 검찰에게 기록의 열람등사를 허용하라고 스스로 명령해 놓고도 자신의 명령을 위반하고 있는 검찰의 노골적인 수사기록 은닉행위를 수수방관하고만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더구나 압수영장을 발부하여 수사기록을 압수해달라는 요청은 물론 검찰이 공개를 거부하는 수사기록을 교부할 때까지 공판을 중지함으로써 검찰이 법원의 열람등사허용결정을 이행하도록 하는 등 재판의 공정한 진행을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해 달라는 변호인단의 요구마저 묵살하며 국선변호인을 선임하여 재판을 강행하려고만 한다. 심지어 점잖게라도 검찰에게 ‘수사기록 내 주는 게 어떠냐?’는 한마디조차 들을 수 없다.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를 개시하라는 법원의 명령을 검사가 위반한 경우 피고인에 대한 공소를 기각하고 더 나아가 검사의 명령불이행을 범법행위로 처벌하는 미국 같으면 용산재판부의 이 같은 침묵은 거의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실제 올 4월7일 미국 워싱턴 DC를 관할하는 연방지방법원 판사 에멋 설리번은 전 연방상원의원을 수사하고 기소한 검사들이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를 숨기고 이를 개시하라는 법원의 명령을 위반하자 피고인에 대한 공소를 기각한 후 관련 검사들을 수사하여 처벌할 필요가 있다며 법무부 장관에게 특별검사 임명을 요청한 바도 있다.

대통령이나 국회와 달리 사법부는 국민이 직접 선출한 권력이 아니며 그 대표성은 허약하기 짝이 없다. 그런 만큼 사법부가 그 권위를 인정받으려면 오로지 헌법의 가치와 정의감으로 무장하여 공정한 재판에 모든 것을 거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전혀 없다. 상대가 누구든 불문하고 오로지 정의와 공정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기개로 단호하게 행동하는 것, 그것만이 비록 선거로 신임을 받지는 않았으나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받고 권위를 인정받는 유일한 길인 셈이다. 반칙하는 상대방이 힘이 세다고 심판이 눈을 감고 침묵한다면 누가 판정에 승복하겠는가?

법관의 독립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 법관의 독립은 무력이든, 정권이든, 금력이든, 힘을 가진 자에게서 영향을 받지 않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재판을 하기 위한 것이며, 공정과 정의에 대한 지향이 없는 독립은 공허하고 편협할 뿐이다. 자신의 가치와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 타인의 재판에 간여한 신 대법관의 작위(作爲)와 힘센 검찰의 증거은닉행위를 눈감고 수수방관하는 용산재판부의 부작위(不作爲)는 그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 공정하고 정의로운 재판을 위한 사법부의 독립을 스스로 포기하고 훼손하였다는 점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신 대법관이 사퇴하도록 판사들이 나서야 하는 이유도, 검찰의 사법방해행위를 법원이 규탄하고 이를 제재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공정하고 정의로운 재판을 이루기 위한 법원의 독립에 있지, 독립을 위한 독립에 있지 않은 것이다.

내 손이 아니면 결국 남 손에

신 대법관의 재판개입행위를 대법원장이 지시하였거나 묵인하였는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때문인지 대법원장은 이번 사태가 알려진 직후부터 유독 신 대법관을 감싸는 태도로 일관해 왔는데, 엄중한(?) 경고만 하고 징계위원회에 회부하지 않는다는 어제의 결정으로 대법원장을 통한 사법부의 신뢰와 권위 회복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대표적인 보수논객이라는 어느 대학교수가 지적했듯 최고법원에 속한 법관들의 명예는 스스로 지키는 것이지만 신 대법관은 그나마 명예롭게 사퇴할 시점마저 지나버린 것 같다. 그리고 사법부 전체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더욱 추락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대법원장이, 그리고 신 대법관이 막지 못한 신뢰와 권위의 추락을 막고 사법부를 추스를 임무는 이제 신 대법관의 사퇴나 징계를 요구했던 소위 소장판사나 단독판사들에게 남겨져 있다. 그러나 이들이 자구노력이 사법부의 ‘독립을 위한 독립’을 주장하는 데 그친다면, 그로써도 사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제자리잡을 것이라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내부의 자구노력마저 수포로 돌아간다면, 종래는 그 밖에서 지켜보던 국민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

세상에 공짜 없는 법이다. 내 손으로 이루지 못하고 남의 힘을 빌 때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남의 힘을 빌지 않도록 부디 판사들의 멀리 내다보는 시각과 옹골찬 결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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