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5차 핵실험 이후 격한 감정들을 고스란히 담긴 반응들을 보면 매우 혼란스러워진다. 독자 핵 무장론이니 전술핵무기의 주한미군 재배치 등의 거론에서부터 대통령의 국내 불순세력 감시 촉구에 이르기까지 이거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잘 모르겠다. 특히, 북한 5차 핵실험과 SLBM 성공 이후에도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돌아가는 사드 배치 주장을 접하면 혼란은 더 커진다.

애초 정부 설명대로라면, 사드 배치는 북한의 핵미사일에 대한 자위권 차원의 조처다. 방사능 낙진 등으로 인한 피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게 고도 50~150km에서 요격한다는 게 핵심이다. 핵미사일 보유 가능성이 아니라 핵미사일을 전제한 설정이다. 수도권이 방어 대상에서 빠진 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남쪽을 겨냥한 지상 발사대가 아닌 이동하는 잠수함에서 발사하면 사실상 무용지물이 된다는 우려가 있었다. 불행하게도 북한은 보란 듯이 SLBM 발사를 성공시켰다. 그러자 핵잠수함 필요성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런데 이건 사드랑 관련이 없다. 핵미사일이 실렸을 가능성이 있는 북한 잠수함을 처음부터 끝까지 추적해서 수중에서 요격하기 위해 핵잠수함이 필요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형 핵탄두 개발에 성공한 5차 핵실험으로 북한이 핵미사일을 남쪽을 향해 쏜다는 정부의 전제에는 달라질 게 없다. 있다면 ‘설마 이렇게 빨리 소형 핵탄두를 개발할 몰랐다’라는 정도인데,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 사드 배치를 내년 12월 대통령선거 이전에 남쪽에 배치하겠다는 계획이었으니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9일 밤 조기 귀국해 청와대에서 열린 안보상황 점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연합뉴스)

그런데 막상 핵미사일이 현실화하니 패닉에 빠진 꼴이다. 대통령은 김정은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하고 국방부는 김정은 제거를 통해 핵미사일을 무력화할 수 있다고 공언한다. 그다지 영양가도 없는 말의 성찬이 봇물을 이룬다. 일부 언론들은 ‘자체 핵무장론’이나 ‘전술핵무기의 주한미군 재배치’ 등을 내비친다. '확산 억제‘를 위해 미국이 제공하겠다는 ’핵우산‘도 그리 미덥지 못하니, 재래식 무기와 핵무기의 불균형은 오직 남한 내 핵무기의 존재를 통한 ‘공포의 균형’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게 요지다.

따져보자. 자체 핵무장이니 전술핵무기의 주한미군 재배치가 미국이나 중국의 반대로 현실화 가능성이 낮다는 것은 논외로 치자. ‘공포의 균형’이 핵심이라면, 이 주장은 처음부터 나왔어야 했다. 핵에는 핵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굳이 사드 배치 따위를 말할 필요가 없다. 내가 이해하는 공포의 균형은 ‘선제공격 당하더라도 적에게 그 이상을 보복을 가할 수 있는 능력의 보유를 통해 충돌을 억제하는 것’이다. 냉전 시절 땅 덩어리가 무지하게 넓은 미국이나 옛 소련은 대륙간 핵탄두를 지상에다 흩어져 배치하기도 했지만, 좁은 땅 덩어리의 대한민국에서는 부질없는 일이다. 그러느니 핵미사일을 잠수함에 싣고 돌아다니는 게 공포의 균형을 맞추는 데는 제격이다. 굳이 사드 따위는 필요하지도 않다는 얘기다.

돌파구 마련을 위한 파격의 카드 차원에서라도, 자체 핵무장이나 전술핵무기의 주한미군 재배치는 일찌감치 꺼내들었어야 했다. 미국이나 중국이나 다 화들짝 놀랄 사안이지만, 충분한 사전협의를 통해 대화와 협상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전략적 게임 차원에서 해봄직한 일이었다. 하지만 대화와 협상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현 정부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공포의 균형은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남쪽이 꿈꾸는 공포의 균형은 매우 어려워 보인다. 미국(과 동맹국인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북한에 대해 핵 우위를 점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쪽이 공포의 핵 균형을 내세운다면, 이는 결국 미국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와 직결된다. 이는 곧 누구의 말대로 한-미 동맹의 파탄까지 각오해야 할 일이다. 사드 배치 건으로 미뤄 짐작하건대, 대한민국의 핵무장에 대해 중국이 어떻게 나올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역설적으로, 북한으로서는 이제야 겨우 ‘공포의 균형’을 달성했다고 볼 수도 있다. 북한이 공격을 당하면 중국이 바로 한국이나 일본이나 미국을 향해 대응 공격을 하는 관계가 형성돼 있는지 안 돼 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북한은 자체 핵미사일 개발을 통해 공포의 균형을 이뤘다. 2003년 미국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을 보면서 ‘핵무기가 없어서 이라크는 침략 당했어’라고 느꼈을 북한의 공포는 이제 완화했다고 할 수도 있다.

역설적이게도, 현 정부는 북한의 핵미사일 공격 가능성을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놓지 않았던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해본다. 오히려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더 많았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할아버지의 모습까지 닮으려는 3대 세습이라는 웃픈 통과의례를 통해 등장한 북한의 김정은 정권의 취약성을 공략하여 붕괴시키거나 교체시키거나 하는 게 최우선 관심사항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개성공단 철수까지 감수한 게 이를 상징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제재를 통해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시도를 좌절시키려는, 아니 북한을 붕괴시키거나 정권을 교체하려는 그동안의 노력은 실패한 것으로 봐야 한다. 북한 5차 핵실험 이후 나온 패닉의 모습은 ‘공포의 우위’가 ‘공포의 균형’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나온 짜증과 탄식이 아닐까 싶다. 근본적 재검토가 시작돼야 할 지점이다. ‘북한식’ 공포의 균형이 달성됐다는 건, 대화와 협상의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는 의미도 된다. 과연 현 정부는 이것을 인정할 수 있을까? 혹시 이미 우리에게는 실효성을 크게 상실한(그러나 한반도 남쪽이 전초기지이며 여기에 배치된 주한미군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에는 여전히 유효한, 그리고 북한에 대한 제재를 더 세게 하라고 중국에 압력을 가하겠다는 생각에) 사드를 몇 개씩 도입한다고 하지나 않을까? 혹시 갑자기 핵잠수함을 개발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하지는 않을까? 분노 섞인 말을 자제하고 대화와 협상에 나설 준비를 하는 게 시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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