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필 경기도 지사의 행보가 가파르다. 행정수도 이전을 거론한 데 이어 안보보수의 금기인 모병제를 제안하고 나왔다. 어차피 인구절벽으로 현재의 병력 수준을 유지하기 어려운 만큼 차제에 모병제로 전환해 30만명 정도의 작고 강한 군대를 만들자는 것이다. 모병제는 또한 병역 특혜 시비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청년들에게 9급 공무원 수준의 일자리를 제공하며, 가혹행위나 안전사고 등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병사 1인당 월 200만 원 정도를 지급하는 데 필요한 3조원 정도의 예산은 전체 국방비 규모에 비춰 감내할 만하며, 여러 사회적 비용이 줄어드는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이익이라는 주장도 덧붙인다. 상당히 일리가 있다.

남경필 경기도지사 [연합뉴스 자료사진]

아니나 다를까, 다양한 반대의견이 나왔다. 우선 남 지시가 속한 여권 대부분이 부정적이다. 예산과 도입 시기, 안보 환경 등이 반대의 이유다. 국방부와 안보 장사하는 극우단체들이 반대대열에서 빠질 리 없다. 그러나 대륙간 미사일이 날아다니는 시대에 병사의 머리 숫자가 곧 국방력인 것으로 착각하는 집단의 반대 이유는 별로 들을 가치가 없다. 하이테크 전쟁이라는 현대전의 특성, 인구통계학적 전망, 경제활동인구 축소로 인한 경제적 손실, 입직연령이 늦어지는 것과 그로인한 연쇄적인 결혼연령 지연, 저출산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하면 현재 운용하고 있는 징병제의 골격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시대착오적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다만 눈길을 끄는 것은 유승민 의원의 반대다. 유 의원은 예산 등의 기술적인 이유보다 모병제를 실시할 경우 가난한 집 자식들만 군대를 갈 것이고, 이는 정의롭지 못하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날카로운 지적이다. 우리사회에서 병역문제에 대한 토론이 정책적 합리성보다 정서적 수용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정확히 짚고 있다. 한국인들의 평등의식이 매우 높기도 하지만 특히 병역특혜에 대해서는 국민 모두가 에누리 없이 강한 분노를 드러낸다. 그만큼 병역문제는 민감하고 인화성이 높다. 2002년 대세론을 구가하던 이회창 후보가 낙마하는 데 두 아들의 병역면제의혹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이는 삶의 다른 영역에서 수많은 특권과 불평등을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것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남경필 지사 입장에서도 아마 유 의원의 반대가 가장 신경이 쓰이나 보다. 다른 반대 주장들은 가볍게 넘기더니 유 의원의 발언에 대해서는 '정의를 독점하는 것은 전체주의의 시작'이라며 격하게 반응했고, 정식으로 공개토론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 토론은 성사가 돼도 평행선을 그을 가능성이 크다. 앞서 지적했듯이 남 지사는 정책적 합리성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유 의원은 정서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접근 모두 부분적 타당성이 있다. 그렇다면 병역문제, 즉 군인력 체제 개편은 두 접근의 취지를 모두 반영하는 절충방안에서 해법을 찾는 것이 좋겠다. 일명 하이브리드 해법이다.

유승민 의원 [연합뉴스 자료사진]

하이브리드 해법이란 요약하면 징병제의 틀을 유지해 병역의무에서의 평등과 정의라는 국민의 정서적 요구도 존중하고, 대신 복무기간을 단축해 경력단절과 그로인한 경제·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고, 하이테크 강군을 육성할 수 있도록 모병제 요소를 가미하는 방안이다. KDI국제정책대학원의 이주호 교수가 지난해 발표한 군인력체제 개편안의 핵심 골자인 '전문병사제'가 여기에 해당한다. 의무복무 기간을 12개월로 하고, 그 가운데서 4년간 복무할 전문병사를 모집하며, 일반병사와 전문병사를 각각 15만 명 수준으로 유지하는 방안이다. 정의당이 지난 총선에서 내놓은 국방공약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단 정의당의 안은 의무복무 기간을 6개월로 하고, 의무 복무하는 일반병사 10만, 전문병사 10만, 간부 20만 해서 40만명 수준으로 병력을 유지하는 방안이다.

상상력을 조금 더 발휘한다면 이번 기회에 '전국민의무복무제' 같은 것도 생각해 봄직하다. 현재의 징병제는 일단 여성 제외 그리고 신체 조건이나 건강상의 이유로 제외하는 것 말고도 병역특례라는 이름으로 여러 형태의 합법적 병역특혜를 부여한다. 전국민의무복무제는 여성을 포함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국가를 위해서 일정기간 공익적 근무를 하도록 의무화하는 방안이다. 단 복무형태는 군만이 아니라 해외봉사, 복지기관 근무, 행정보조, 보조교사 등 각종 공익적 활동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고, 복무형태에 대한 선호도와 인력수급계획에 따라 복무기간에 차등을 둘 수 있다. 이 제도를 도입하면 모든 특혜시비는 없어질 것이고, 병역가산점제도 논란같은 무의미한 논쟁도 사라질 것이고, 군은 충분한 징병대상 인력을 확보할 것이고, 실질적으로는 모병제로 전환되는 것이다.

여권 내에서 국가적 의제를 놓고 흥미로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야권 잠룡들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2012년 진작 모병제를 제안했던 김두관 의원이 남경필 지사의 토론회에 참석해 공감을 표시했지만 그는 이번에는 대선에 뜻이 없다. 모병제가 별 중요한 의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라면 너무 나이브하고, 남 지사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어 상대방을 띄어줄 필요가 없다는 공학적 계산 때문이라면 너무 속좁은 태도다. 혹시 이런 사안에 대해 아직 준비가 부족해서 그런 거라면 분발이 요구된다. 여야를 막론하고 대선 잠룡들이 무조건 권력을 달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사에 대해 거침없이 논쟁하기를 바란다.

[윤석규의 공감정치] 더 보기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