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에게 연상호는 최근 개봉해 폭발적인 흥행 성적을 거둔 좀비 블록버스터 <부산행>의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1997년부터 꾸준히 독립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온 중견 연출자다. 동시에 작품마다 관객들의 호불호를 가르는 선명성을 지닌 창작자이기도 하다.

그는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지옥 –두 개의 삶>을 비롯, <돼지의 왕>, <사이비>를 통해 잔혹한 폭력의 미학을 아낌없이 발휘하며 한국 사회의 밑바닥을 날것으로 드러낸 바 있다. 최규석의 동명 만화를 바탕으로 만든 <사랑은 단백질>, <창>은 앞서 예로 든 작품들에 비하면 폭력의 강도는 덜하지만 원작에 서린 시니컬한 페이소스를 재해석해 무척이나 노골적으로 한국 사회의 모순을 그렸다.

부산행 vs. 서울역

그런 연상호의 스타일을 좋아했던 팬들에게 <부산행>은 애매모호한 작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연상호의 이름을 대중적으로 각인시킨 작품이지만, 동시에 그간 연상호의 작품에서 드러났던 고유한 특징을 발견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작비가 100억에 달하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연출한 부담감이 문제였을까? 초반부에 명민한 연출을 선보였던 작품은 결말로 갈수록 신파에 머무르고 만다. 한국 최초로 좀비물이라는 장르를 명확히 이해하고 만든 작품이라는 의의가 있고, 사회 풍자적 시선 역시 흥미롭지만, 통속적 결말로 마무리 지은 점은 자못 아쉽다.

반면 지난 8월 17일 개봉한 <서울역>은 <부산행>에서 부족함을 느낀 관객들에겐 흥미롭게 각인될 것이다. 일단 <서울역>은 좀비영화라는 공통점을 빼면 <부산행>과는 반대편에 서 있는 작품이다. <부산행>의 프리퀄(전작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이야기를 다루는 속편)로 홍보되고 있지만, <부산행>과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것은 물론 <부산행>의 복선들은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따라서 <부산행>에서의 인상을 기대하고 <서울역>을 봤다가는 당황할 수 있다.

하지만 <서울역>은 <부산행>보다 훨씬 많은 미덕을 갖추고 있다. 대중성을 위해 많은 부분을 타협한 <부산행>과 달리 연상호가 그간 만들어온 작품들의 연장선상에서 좀 더 농밀하게 한국 사회의 모순을 꼬집기 때문이다.

<부산행>이 처음부터 KTX 열차에 탑승한 이들의 연대로 시작했던 것과 달리, <서울역>에서 이렇다 할 연대 의식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같은 약자들 사이의 무관심과 폭력이 부각된다. 서울역의 늙은 노숙인이 정체불명의 생물체에게 목이 물려 서서히 죽어가고 있지만 경찰과 역무원은 물론 다른 노숙인들마저 도울 생각은커녕 자기의 잇속을 챙기기에만 바쁘다. 그 사이에 늙은 노숙인은 좀비가 되고 그렇게 서울역을 시작으로 좀비가 퍼져나간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어느 노인의 사망이 사회 구성원 모두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설정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가족 바깥의 주체

<서울역>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무언가를 원하고, 그것을 가지지 못해 고통을 겪는다. 가출 소녀 혜선(심은경), 혜선의 남자친구 기웅(이준)을 비롯해 노숙인들은 자신들이 안전히 머무를 수 있는 따뜻한 집을 원한다. 좀비와 좀비를 진압하러 온 전경들 사이에 묶여 신세를 한탄하는 어느 중년 남성은 열심히 노력했지만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것을 한탄한다.

그러나 이들은 같은 공간에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즉자적 욕구만 외칠 뿐 쉽사리 뭉치지 못한다. 그렇게 모두가 흩어진 가운데, 공권력은 폭력으로 상황을 제압하는 ‘쉬운 길’을 택한다. <부산행>에서 드러나는 연대의 모습에 비하면 절망적이지만,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의 맨 얼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점을 갖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서울역>은 <부산행>처럼 가족주의적 화해의 방향으로 흐르지도 않는다. 대신 강도 높게 사회 비판적 시선을 유지하며 풍자한다. 사회적 복지의 필요성을 말하는 두 남성은 정작 자신들 옆으로 노숙인들이 지나가자 무시하고 경멸한다. 여자친구 혜선에게 가부장적 폭력을 행사하는 기웅은 가부장으로써 필요한 경제적 지위도 갖추지 못한 채 밤새 PC방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가장 큰 보호자가 될 줄 알았던 혜선의 아버지 석규(류승룡)는 막판에 이르러 가족주의의 민낯을 고스란히 벗겨내는 존재가 되고 만다.

<서울역>이 치닫는 결말은 인상적이다. 집이 없는 자들은 좀비들을 피해 집들을 찾아다니다 비로소 아늑한 집에 도착하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파국이 벌어진다. 끝없는 절망 속에서 혜선은 세상의 끝에 도착하고 나서야, 남자친구 기웅과 아버지 석규의 허울뿐인 보호에서 벗어난다. 잠시지만 주체적인 존재가 되는 셈이다. 전작에서 여성 캐릭터를 지나치게 수동적으로 표현해왔다는 비판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어도, 가부장 사회의 단편을 폭로하고, 여성이 주체적으로 자립하기 어려운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독립애니메이션의 또 다른 성취

분명 <서울역>은 속도감 있고 대중적인 좀비영화를 바랐던 관객들에게는 낯선 작품이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좀비보다는 인간의 광기와 폭력에 초점을 맞추기에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그러나 좀비영화는 본디 ‘좀비의 출현’을 통해 인간의 위선과 부조리한 사회를 풍자하는 것을 요체로 발전해왔다. 좀비영화의 클래식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조지 로메르가 좀비들로부터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좀비보다 더 끔찍하고 무서운 존재가 될 수 있음을 풍자했던 것처럼 말이다.

<서울역> 역시 좀비 이상으로 참혹한 모습을 드러낸 우리 사회에 질문을 던진다. 저예산 애니메이션으로써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전반적인 품질의 저하가 아쉽지만, 최근 제작된 좀비물 대다수가 폭력적인 액션을 강조할 뿐, 사회 비판적 시선이 부족했던 것을 생각하면 <서울역>의 미덕은 충분하다. <서울역>은 시원하고 통쾌한 장면이 없다는 이유로 놓치기엔 아쉬운, 한국 독립 애니메이션의 일보전진을 이룬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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