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가 7일 대표연설에 나서면서 주요 원내교섭단체 대표 연설이 마무리 됐다. 이 시기 교섭단체 대표들의 연설은 앞으로 본격적으로 전개될 대선 레이스의 향방을 점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의 5일 연설은 이후 정권재창출의 방식에 대한 별 고려가 없어 보인다는 점에서 오히려 흥미롭다. 호남 지역에 대한 전향적 발언과 민주정부 10년에 대한 반성을 표현하기는 했으나, 핵심은 여소야대 국면에서 국회를 비판하고 야당의 문제제기를 ‘발목잡기’로 규정하는 것이었다. 특히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정치개혁을 위한 위원회를 만들자고 제안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과거 국회가 경제활성화의 발목을 잡는다며 국민들에게 직접 호소했던 사례를 연상시킨다. 그 국민들은 4·13 총선에서는 대거 야당의 손을 들어줘 지금의 여소야대 국회를 만들었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5일 오전 국회 본회의에서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정현 대표의 이런 태도와 현실인식은 여당이 얼마나 취약한 정치적 지반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4·13 총선으로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면 당연히 이 시기에는 정권재창출을 위한 나름의 변신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새누리당이 현재 집중하고 있는 대목은 오로지 남은 박근혜 정권의 임기를 ‘식물’ 상태로 유지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김무성 전 대표나 유승민 의원 등 당 내에서 중심을 잡고 차기 대권주자로서의 행보를 할 수 있는 인사들에게 좀처럼 여지를 주지 않고 있다.

유일하게 정권재창출의 수단처럼 언급하고 있는 게 ‘서진정책’인데, 이는 대구경북-충청-호남의 지역연대론에 입각한 행보다. 그런데 이 구도는 오로지 충청 지역 출신의 대권주자가 등장할 때에만 유효하며, 그나마도 호남 지역의 경우 아무리 이정현 대표의 당선이라는 이변을 이끌어냈다고 해도 국민의당과 더불어민주당이라는 양대 선택지가 있는 상황에선 의미 있는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충청 지역 출신의 대권주자’로 강력하게 회자되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실제 출마를 결심할지도 아직 알 수 없고, 설사 국내정치에 관여하게 된다 해도 이른바 ‘친박’들이 바라는 대로 움직여 줄지도 미지수다. 여당 출신의 유력 대권주자가 인기 없는 대통령과 선을 긋지 않은 사례는 별로 없다. 어떻게 보면 반기문 총장은 오로지 박근혜 정권이 통치권력 유지를 위한 일종의 ‘맥거핀’의 신세가 돼버릴 수도 있다. 이런 판국이니 이재오 전 의원 등이 주도한다는 늘푸른한국당 창당 같은 주변적 사건에 필요 이상의 관심이 집중된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6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민생경제 위한 긴급회담을 제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당이 이런 식으로 지지부진이니 야당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건 당연한 결론일지 모른다. 6일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의 연설은 민감한 정치 현안을 배제하고 ‘민생경제’라는 단 하나의 포인트에 집중했다. 대통령에게 긴급회동을 요구하고 가계부채 문제 해결을 위한 위원회 구성을 제안하며 법인세 정상화 등을 요구했다. 눈길이 가는 대목은 ‘경제민주화’와 ‘소득 주도 성장’을 언급한 대목이다. 두 정책 슬로건은 각각 김종인 전 비대위 대표와 문재인 전 대표가 트레이드 마크로 삼고 있다.

즉, 추미애 대표의 연설에 담긴 함의는 4·13 총선의 구도를 그대로 대선까지 갖고 가겠다는 걸로 요약할 수 있다. 김종인 전 비대위 대표의 중도적 이미지와 ‘팬’층이 두터운 문재인 전 대표의 강점을 최대한 살리겠다는 거다. 추미애 대표가 경선 과정에서 김종인 전 대표와 ‘탄핵 논란’을 벌인 이후 ‘제3지대론’에 힘이 실리자 부랴부랴 화해에 나선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결국 전통적인 ‘민주세력’의 이슈에서 중도에 보다 힘을 실은 모델을 문재인 전 대표의 동력으로 삼아 안정적으로 대권 레이스를 관리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추미애 대표의 이날 연설을 두고 국민의당 등은 벌써 집권여당 흉내를 내느냐며 반발하였는데, 이러한 분위기에는 추미애 대표가 민감한 정치현안에 대한 발언을 아낀 데 대한 불만도 작용하였겠으나 ‘벌써부터 대통령 행세냐’는 견제심리도 발동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7일 박지원 비대위원장의 대표 연설 중에 여러 메시지가 포함됐음에도 ‘새판짜기’를 강조하며 ‘대선 플랫폼 정당’을 언급한 대목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다. 언론은 당장 손학규 전 의원 등에 대한 ‘러브콜’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는데, 국민의당 내부에 향후 진로에 대한 이런 저런 갑론을박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박지원 비대위원장의 이런 구상은 ‘문재인 포위망’을 모색하겠다는 것에 가까운 걸로 느껴진다.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이 7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찌됐건 야권의 대권주자들이 정정당당한 경쟁을 통해 각기 부족한 점을 채워나가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한국 정치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각 당이 이번 연설을 통해 드러낸 대선전략이 여전히 공학적인 것에 머무르고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는 거다.

대선에 임박한 유권자들은 언제나 전임 정권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각 후보들을 평가하기 마련이다. 박근혜 정권은 무능한 국정운영과 자기중심적 정치관, 독재를 연상케 하는 행정부 우위가 특징이다. 이의 반대를 찾자면 유능한 국정운영과 유연한 의회중심의 정치를 보여줘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기계적 구도를 넘어서 실제로 정권의 성격이 대중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중심으로 보는 게 더 중요하다. 박근혜 정권의 무능과 일방독주식 폐쇄적 국정운영은 대중에 냉소와 절망을 안기고 이들을 급진화시키고 있다. 이는 세계 곳곳에서 드러나는 바와 마찬가지인데, 그 결과가 미국의 경우 트럼프와 샌더스의 구도로, 유럽의 경우 극우정치의 급격한 확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치권의 메시지가 대중을 따라 과격해지거나 보다 진보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적어도 이들의 시대적 요구를 어떻게 기성정치의 틀에서 소화할 것이냐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다. 최근 이재명 성남시장이 대선 출마를 시사하였는데, 여기에 대고 ‘샌더스와 같은 역할을 해달라’는 주문이 즉각적으로 나오는 매커니즘을 이해해야 한다. ‘샌더스의 역할’을 하라는 것은 어차피 대선후보는 안 될 테니 문재인 전 대표가 대권주자로서 놓치고 있는 부분을 보정해 정권교체에 기여해달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순전히 이들의 인식으로만 보자면 이재명 시장은 ‘새로운 정치’이고 문재인 전 대표는 ‘기성정치’이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이런 구도가 마찬가지로 ‘기성정치’로 묶이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에 어떤 위협이 되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정치의 기본을 말하자면 ‘저항의 논리로 통치를 쟁취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저항의 논리는 늘 일관되지도 구체적이지도 않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의 요구에 담긴 실질적 시대정신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정치권은 대선 전략으로 서진정책, 중도화, 플랫폼 정당 등을 말하지만 지금 정치권에 이보다 중요한 것은 대중이 요구하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간파하는 것이다. 원내교섭단체들의 대표연설에서는 아쉽게도 이러한 고민의 흔적이 묻어 나오지 않았다. 대중은 ‘정답’을 써내지 않지만, 정치는 정답을 찾아야만 한다. 앞으로 시간이 여전히 남아있으니 만큼 정권을 바꿔보자는 사람들이 이를 찾기 위한 치열한 고민의 시간을 충분히 가졌으면 한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