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정책혼선이 나날이 도를 더해가고 있다. 언론은 컨트롤타워의 실종을 얘기하고 있으나, 이를 말하기 전에 정부가 문제해결의 의지를 갖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는 지적을 내놓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든 오늘만 살아내면 된다는 단기적 현실 인식에 의한 정책 대응이 정부 관료들의 ‘각자도생’식 세계관으로부터 온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새누리당은 6일 한진해운 물류대책 관련 당정 협의 결과를 공개했는데, 나랏돈을 지원할 수 없다는 그간의 입장과는 달리 한진그룹이 담보를 제공할 경우 정부가 1천억 정도의 자금을 저리로 지원해줄 수 있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한진해운 소유의 선박 145척 중 목적지에 근접했음에도 하역을 하지 못하고 있는 배가 87척이고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지만 해상에 있는 다른 배를 합하면 97척에 이르는 상황에서, ‘인질’이 돼버린 화물의 하역을 위해서는 자금 수혈이 불가피하다는 거다.

그간 정부와 한진그룹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물류 대란’에까지 이르는 상황을 서로 방관해왔다. 한진그룹의 입장에선 정부가 아무리 해운업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강조해도 물류대란이 일어나는 시점에 이르기 전에 조치를 취해줄 수밖에 없을 거라는 인식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구조조정을 추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인식 속에서 자신들의 책임을 최소화하고 나머지는 ‘민사적 문제’로만 사고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날 공개된 당정협의의 결과는 이런 두 인식이 크게 변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대책 마련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걸 보여준다. 요약하자면 정부의 대책은 여전히 한진그룹에 최소한의 성의(?)를 보일 것을 요구하고 있고, 한진그룹은 미적대는 분위기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상황을 단기적으로나마 해소할 필요는 있을 것이기 때문에 어떤 형식으로든 자금수혈은 이뤄질 수 있을 걸로 보인다.

그러나 정부 대책이 처음부터 안일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걸 피해가기는 어렵다. 그간 자율협약 하에서 금융당국이 중심이 된 채권단과 한진그룹 측의 협상은 지금 표면에 드러난 것처럼 시종일관 책임을 떠넘기는 식으로 진행돼왔다. 한진그룹의 무책임한 대응이 충분히 예고되는 상황에서는 정부가 이러한 ‘물류대란’을 방지할 수 있는 비상대응시나리오를 갖고 있었어야 했다. 특히 사실상 한진해운의 ‘공중분해’를 전제하고 한진그룹과 현대상선이 우량자산을 나눠갖는 모양새를 유도하는 와중에는 특히 그랬어야 한다.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왼쪽), 박명재 사무총장이 6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한진해운 문제 처리와 관련해 국회를 방문한 서병수 부산시장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비상대응시나리오를 갖고 있었는데 작동을 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그런 게 처음부터 없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정부가 이에 대해 “대책이 부족했다는 것은 인정한다”고 반응하고 있다는 거다. 처음에는 “대마불사의 신화가 깨졌다”며 환호하던 보수언론이 단 며칠 만에 정부의 후속 대응이 사실상 없다는 걸 집중 성토하고 있다는 점도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된다. 국가기간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진행하면서 ‘우량자산은 재활용하고 나머지는 버리자’는 대응 외의 산업적 전망을 아무도 고민하지 않은 것 아닌지 의문이다.

그런데 정부 관료들의 이런 태도는 사실 전형적인 것이다. 당장 해야 할 최소한의 일만 하고 나머지 장기적 전망에 대한 고민 따위는 일단 유예하는 건 자기 일에 확신이 없다는 것에 가깝다. 관료들이 일에 확신을 갖지 않는 것은 물론 그들이 나태하고 자기 잇속만 챙기는 존재라는 대중적 편견에 가까운 측면이 분명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오히려 일에 확신을 가질 수 없게 하는 다른 요인이 있는 것은 아닌지도 박근혜 시대를 사는 우리가 따져보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관료들이 일에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성과와 보상의 문제가 명확해야 한다. 해운업 구조조정의 성과가 예측되고, 이에 의해 보상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 명백하다면 관료들이 책임감을 갖고 움직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런 문제는 언론이 종종 예로 드는 이른바 ‘변양호 신드롬’과 같은 것들에서도 나타난다. 총대를 메봐야 성과도 나지 않고 오히려 처벌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거다. 보수언론은 이 사례를 꼭 자신들이 원하는 규제완화 등의 문제에서만 예로 들고 있으나 사실 이런 상황은 모든 분야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성과도 없고 보상도 명확하지 않으니 남는 것은 ‘각자도생’ 뿐이다.

이를테면 정부의 가계부채 대책을 보자. 애초에 이 문제를 심화시킨 단기적 원인은 경기부양을 위해 부동산 규제완화를 추진하고 이로 인해 증가할 수밖에 없는 가계부채를 떠받쳤어야 할 가계소득 증대에 대해선 핑계로만 일관한 ‘초이노믹스’이다. 가계부채에 대한 대책은 차일피일 미뤄지다 올해 초 금융당국이 여신심사가이드라인을 내놓는 수준에서 적당히 봉합되었다. 시중은행에게 대출 시 심사를 강화하고 고정금리로 원금을 포함해 상환토록 하라는 게 핵심인 이 대책은 가계부채가 제2금융권 또는 비은행예금취급기관 등으로 이동하는 풍선효과를 낳았다. 애초 초이노믹스가 초래한 문제인 부동산 경기 부양은 집단대출이 가계부채 증가의 고질적 문제가 되는 걸로 이어졌다.

가계부채 문제가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수준에 이르자 한국은행과 금융위원회가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 돌입한 것은 일련의 사태에서 ‘절정’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보다 못한 기획재정부가 중재를 서 논의단위를 만들고 이후 공급을 축소해 집단대출 리스크를 관리하겠다는 8·25 대책이 발표됐으나 문제는 더 악화되고 있다. 공급 축소를 호재로 판단한 부동산 시장이 다시 과열조짐을 보인 것이다. 5일 금융위원회는 부랴부랴 후속대책을 내놓았으나, 대부분 원래 있던 대책의 시기를 조정한 것 정도의 수준이어서 시장에 미칠 영향은 크지 않을 걸로 예상되고 있다.

8월 25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이문기 국토교통부 주택정책관(왼쪽)이 가계부채 관리방안으로 택지 공급조정 방침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오로지 오늘을 살아내면 되고 나머지는 각자도생의 문제가 되는 건 최근 우리 삶을 위협하고 있는 감염병 문제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주사기 재사용 등의 문제로 C형간염 등 의료감염 문제가 발생한 것은 비용을 아끼고 돈벌이를 위한 상품을 개발해야 하는 1차 의료기관들이 처한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투석 중 C형간염 환자가 발생한 건대충주병원 사례도 결국 재정의 문제이다. 충주권에서 생활하는 네티즌들은 지역에서 건대충주병원에 대한 평판이 이전부터 좋지 않았다는 지적을 쏟아내고 있다. 이외에 거제 등을 중심으로 논란을 야기하고 있는 콜레라 문제는 또 어떤가. 의사 출신이 장관을 맡고 있는데도 보건복지부는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못한 채 “원래 환경검체 조사를 통한 감염원 규명은 힘들 수 있다”는 식의 변명만 말하고 있다.

정부 부처와 관료들이 이런 상태가 된 것은 결국 권력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박근혜 대통령 역시 국가의 비전이나 정권재창출과 같은 정치적 전망을 말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오늘의 위기를 버티고 넘기는 데 헛힘을 소모하고 있다. 정부와 국회의 인사검증 시스템을 무력화시키고 임명한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흙수저라 무시당했다”면서 자신에 대한 의혹을 보도한 언론에 대해 법적대응을 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라. 아무리 ‘사석’임을 전제하고 하는 얘기였다지만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청문회 자리에서는 왜 “송구하다”고 말했는지 의문이다. 이러한 권력의 기만적 대처는 냉소를 낳고 냉소는 무기력으로 이어지며 무기력은 ‘있는 사람들’에게는 각자도생적 세계관의 습득으로, ‘없는 사람들’에게는 사회적 자해로 이어진다. 이러니 ‘헬조선’이란 말이 안 나오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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