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균 국회의장이 각오를 단단히 한 모양이다. 정기국회 시작부터 불을 확 질러버렸다. 새누리당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심야에 국회의장실을 사실상 점거하는가 하면 다음날인 2일에도 “여당을 농락하고 있다”는 등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는 ‘중증의 대권병’이란 말까지 동원했다. 어떤 의원은 국회의장의 이름에서 착안한 듯 그를 ‘세균’에 비유하는 막말도 내놨다. 그야말로 강대 강의 전면적 대치국면이 이어질 전망이다.

정세균 국회의장의 개회사에 대해 야당은 대체로 ‘할 말을 했다’는 분위기다. 야권 지지자들 중에서는 ‘시원하다’는 취지의 감상을 내놓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박근혜 정권의 앞뒤가 꽉 막힌 국정운영 속에서 국회의장이라도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정세균 국회의장의 개회사 내용이 ‘이례적’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례적’인 것에는 늘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취임 직후에도 개헌 필요성 등을 제기하며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임을 천명한 바 있다. 이번 개회사 문제도 국회의장직에 대한 그러한 역할 규정 속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따져볼 것은 정세균 국회의장이 왜 특별히 이런 역할 모델을 선택했느냐이다.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가 1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정기국회 개회식에서 정세균 국회의장의 개회사를 문제 삼으며 정 의장에게 항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소 졸렬한 규정이긴 하나,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말하는 대로 ‘대권병’의 문제일 수도 있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어찌됐건 장기간 야권이 갖고 있는 대권주자의 한 사람으로 불려왔기 때문이다. 정세균 국회의장 본인도 기회가 될 때마다 대권과 연계된 자신의 전망을 내보여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입법부의 수장인 국회의장의 지위와 무게를 고려해보면 당장 2017년 대통령 선거에 국회의장 자신이 직접 출마할 가능성이 크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래서 이런 해석은 장삼이사들이 말하는 정치 소설의 좋은 소재이기는 해도 현실적 분석의 맥락에서 설득력 있게 제시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문제는 지금 국회의 현실에서 국회의장의 적극적 역할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는 데에 있지 않나 싶다. 여당 출신 국회의장이 있는 여당 중심 국회에서라면 국회의장은 자신에게 부여된 중립적 의무를 수호해 입법과 행정의 균형을 맞추는 걸 최우선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입법이 행정의 시녀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당 출신 국회의장이 야당과 의견을 같이할 수는 없을테니 중립을 지키는 게 최대치다).

그런데 야당 출신 국회의장이 있는 여소야대 국회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 경우 여당은 정권을 뒷받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행정의 시녀 역할을 자처할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국회의장의 적극적 역할을 통해 입법부가 민의를 반영해 자신의 목소리를 충분히 내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즉, 중요한 것은 입법이 행정에 대하여 얼만큼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느냐의 문제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굳이 ‘국민의 목소리를 전하겠다’는 명분으로 적극적 포지션을 잡은 건 이런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문제를 거론했을 때. 의외로 새누리당 소속 의원들의 반응이 격렬하지 않았던 것 역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우병우 민정수석 문제는 행정부가 정무적 판단을 제대로 내리지 못해 국정을 마비시키는 차원의 문제이다. 따라서 입법부가 이 문제의 실질적 해결을 행정부에 요청하는 게 이상한 그림이 아니다. 특히 이번 사태는 우병우 민정수석이 자기 직을 유지하면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는 특수성도 있다. 여기까지였다면 새누리당 의원들 중 친박 강경파 일부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선에서 끝나지 않았을까 싶다.

우병우 민정수석이 8월 29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제는 정세균 국회의장이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이하 공수처) 신설 필요성을 강조하는 데서부터 시작됐다. 공수처 설치는 우병우 민정수석이 받고 있는 의혹의 연장선상에서 제기할 수밖에 없는 문제인 게 사실이다. 자기 스스로 개혁을 하지 못하는 검찰이 머리 위에 있는 우병우 민정수석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수처 설치는 최종적으로는 입법의 문제이고 이에 대해서는 여야가 서로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우병우 민정수석 문제의 연장선상이라는 맥락을 이해하더라도 새누리당의 입장에서는 국회의장이 편향된 발언을 한 걸로 받아들일 여지도 있다.

사정권력의 위기라는 현실적 문제도 새누리당의 반발을 초래한 원인일 것이다. 4·13 총선에서 대패한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권이 국정 운영을 위해 쓸 수 있는 마지막 카드는 검찰 등 수사기관 및 정보기관을 활용한 사정권력 뿐이다. 우병우 민정수석이 비상식적인 방법을 동원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 중 하나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공수처 신설은 구체적인 안의 내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겠으나 이런 사정권력 마저도 무력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국정을 뒷받침해야 하는 새누리당으로서는 위기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언급이었던 셈이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사드 배치 문제까지 언급한 것은 새누리당이 지금까지의 과정에 대해 가진 ‘편향적’이란 의구심에 결정적 근거를 제공한 걸로 보인다. 사드 배치 문제는 더불어민주당이 국회비준의 필요성을 요구하고 국민의당은 아예 반대 의사를 피력한 바 있다. 새누리당은 공식적으로는 사드 배치 찬성론이지만 어느 지역에 배치할 것이냐를 두고 해당 지역에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인사들이 반발하는 정도의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앞서 우병우 민정수석 등의 문제와도 관계가 없는 사드 배치 문제를 특별히 언급하니 새누리당 입장에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거다. 즉, 종합해보면 정세균 국회의장의 발언은 순전히 새누리당의 관점으로 봐서 청와대, 사정권력에 대한 비토이며 지역기반(TK) 흔들기라는 정파적 의도가 있는 걸로 비춰진 것으로 보인다.

여당이 중심이 돼온 국회사에서 주로 야당이 이런 식의 반발을 해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느낌이 있는 게 사실이다. 평소 국회를 뛰쳐나가는 야당을 비판해온 보수언론은 야밤에 국회의장실을 점거까지 한 새누리당을 점잖게 타이르면서도 정세균 국회의장 발언에 대한 비판에 조금 더 무게를 싣고 있다. 그러나 국민이 보기에 오히려 여당이 국회 내의 논의에 충실할 책무를 저버리고 극단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야권이 손해 볼 일은 없는 국면이 아니냐는 해석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정세균 국회의장이 국회 내 논의를 매끄럽게 이어갈 수 있도록 관리하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사실이니 주말을 경유하여 어느 정도 타협을 위한 논의를 진행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이 정도의 대치정국이 길게 이어지면 정세균 국회의장과 야권이 추경 처리 문제의 책임을 뒤집어 쓰게 될 수도 있고, 이후 이어질 백남기 농민 청문회, 서별관회의 청문회 등에 대한 여당의 노골적 비협조 명분을 제공했다는 불필요한 논란에 휩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추경의 경우 기 합의된 안대로 처리한다는 원칙을 갖고 새누리당의 주장대로 이 건에 한해서만 여야 부의장 중 한 명에게 사회권을 넘기는 것도 고려해볼 만한 선택지다. 새누리당과 합리적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이 이어진다면 야당들끼리 추경 처리를 강행하는 파격적인 수도 모색해볼만 하다. 중요한 것은 이 문제를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정치게임’의 문제로 비춰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차후에는 사안의 성격이 무엇이든 국회의 자리를 지켰느냐 뛰쳐나갔느냐 따위의 지엽적 문제를 갖고 본질을 흔드는 주장이 설 자리가 없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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