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나리액젓을 ‘자발적’으로 들이키고 싶은 사람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다. 물론, <1박 2일>에도 없다. 강호동, 이승기, MC몽, 은지원, 김C, 이수근은 여태 수십 번씩 거무튀튀한 액체를 마셔버렸지만, 여전히 몸서리친다. 적응되지 않는 무엇과의 사투이다.

‘복불복’은 <1박 2일> 그 자체다

▲ '강호동의 <1박 2일>' 화면 캡쳐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까나리액젓 다량 섭취 기네스북에 올라도 되지 않을까 싶다. 방송에 보여지는 것이 전부라면, 놓여있는 6개의 종이컵 가운데 까나리액젓이 아닌 것을 고르는 기술적인 방법은 없다. 복권의 확률보다는 떨어지지만 그냥 ‘운’에 맡기는 수밖에. 거기엔 수리적 판단도 논리적 근거도 없다. 아시다시피 그냥 고르는 제비뽑기이다. 그래서 ‘복불복’이다. 횟수로 2년 넘게 그 한 번의 선택으로 잠자리와 먹거리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 반복적인 패턴이었지만, 여전한 예능의 최강자이다.

리얼리티의 후발주자였던 <1박 2일>은 ‘야생 로드 버라이어티’를 표방하면서 ‘복불복’ 하나로 TV 예능프로그램의 주요한 ‘패턴’을 바꿔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예능 프로그램 포맷과 형식에 원천기술을 인정해 준다고 한다면, ‘복불복’은 <1박 2일>은 원천기술이다. ‘복불복’은 <1박 2일> 그 자체다. 시청자들은 웃는다. 어떤 이들은 자지러질 정도로 그 ‘복불복’을 즐긴다. ‘복불복’은 획기적이다. 거기에는 구태의연한 권선징악이 없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신애리’도, 씩씩하게 재벌과 맞장 뜨는 ‘금잔디’도 없다. 말 그대로 ‘운’ 나쁘면 걸리는 것이니 매번 새롭다.

그러나 그 내러티브에는 함정은 있다. 모두가 불행해지면 안 된다는 한계가 있다. 어찌보면 이건 더 꽉 짜여진 형식일지도 모른다. 6명의 멤버 모두가 까나리액젓을 마실 수는 없다는. 모두가 영하 10도 텐트 속에서 사이좋게 잘 수는 없다. 고기 반찬 먹고, 절절 끓는 온돌방에서 이불까지 덮고 자는 여유를 부리는 3인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복불복이 빛나고, <1박 2일>의 ‘복불복’ 내러티브도 완성될 수 있다.

<무한도전>표 ‘복불복’은?

▲ '무한도전' 방송 캡처
<무한도전>과 <1박 2일>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유재석 VS 강호동’ 대결의 완결판이다. 둘 다 다른 프로그램들을 하고 있지만, 결국 최종적인 승부는 거기서 날 것이다. 얼마 전 <무한도전>이 <1박 2일>의 전매특허인 ‘복불복’을 <무한도전> 식으로 구성하였다. 차용과 진화의 갈림길이었다.

‘무한도전 인생극장 Yes or No’는 <1박 2일>보다는 강도 높은 ‘복불복’으로 유재석, 노홍철, 정준하, 박명수, 전진, 정형돈을 선택의 기로에 세웠다. ‘자장면’을 먹기 위해 ‘마라도’까지 가야 하는 ‘복불복’은 노홍철을 2주 연속 땅 끝에 가게 만드는 고난의 운수로 몰고 갔다. 바쁜 연예인에겐 하루의 야생 체험보다 더 가혹하다고 할 운수였다.

평가는 엇갈린다. <1박 2일>의 트레이드 ‘복불복’을 <무한도전>의 색깔을 입혔다는 박수가 있는가 하면, 섞어 쓰고 가져다 쓰고 식상하다는 야유의 평가도 있다. 돌고 도는 것이 패턴의 사용법이라고 할 때, 예능에 ‘재미’말고 다른 윤리적 잣대를 가져다 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할 때, 시청자 입장에서는 재밌으면 착한 프로그램일 뿐이다. 오히려 그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어느새 죽은 프로그램도 일으켜 세우는 절대반지가 되어, 새삼스런 전성기를 다시 맞고 있는 ‘복불복’의 위력이다.

이제 더 이상 ‘복불복’은 생경한 패턴이 아니다. 원초적인 흥미와 말초적인 자극에 가장 충실한 ‘복불복’은 예능 프로그램의 단골손님이다. 예전의 ‘복불복’이 전체적인 구성 속에 양념처럼 뿌려진 것이었다면, 현재의 ‘복불복’은 <1박 2일>을 거치면서 그 자체로 프로그램을 완성시키는 경지에 이르렀다. 누군가의 불행을 전제로 자신이 가진 것의 소중함을 각인하게 되는 양식이 예능을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한쪽에선 ‘복불복’의 경쟁이 가열찰수록, 점차 강도 높은 벌칙으로 이어져 결국, ‘오락프로그램의 가학성’이 과열될 것이라 우려하고 있다. 그간 숱한 오락 프로그램들이 유쾌한 웃음의 코드로 시작해서 ‘학대’와 ‘괴로힘’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겪었던 점을 기억하면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까나리액젓’을 마셔버리다

신선함과 유쾌함이 없는 ‘웃음’에 대한 냉소와 제작진에 대한 질타가 상식적인 TV 비평이고, 예능 프로그램의 ‘복불복’을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에 대해 대체적으로 동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최 그러고 싶지 않은 요즘이다. 별 일 없이 사는 나날이지만, 사는 것 그 자체가 ‘복불복’은 아닌가 하는 음모론적인 사고가 자꾸 뇌주름을 자극한다.

일 열심히 하고, 할 말 하는 앵커는 보이지 않는 ‘외압’에 의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결혼식을 앞둔 PD는 경찰에게 체포된다. 검은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사과를 하라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무한도전>의 가학성을 꼬집었다. 결국 신경민 앵커가, 김보슬 PD가, <무한도전>이, 그리고 내가 마셨다. 그들이 무얼 특별히 잘못했냐고? 그냥, ‘복불복’이지 싶다. 강호동이 아니라 우리가 시대의 ‘까나리액젓’을 마시고 있다. 그래서 차라리 이 모든 게 퇴행이 아니라 그냥 ‘복불복’이라면 좋겠다. ‘복불복’이 일방적 장악과 억압적 지배보다는 그래도 민주적이지 않은가. ‘강호동의 <1박2일>’이라고 해서, 강호동만이 매일 호강한다면 얼마나 불합리하고 재미없을 것인가.

<1박 2일>이 <무한도전>이, <1박 2일>로 <무한도전>으로 보이지 않는 현실이 나에게 NG다. ‘까나리액젓’을 마시는 TV 속의 그들이 부럽다고 느껴지는 지금, 예능 프로그램 그 자체로 웃지 못하고, 비평하지 못하는 현실이 별로다.

그렇게 까나리액젓을 ‘자발적’으로 들이키고 싶은 사람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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