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영화 <오감도> 포스터를 보았는가. 아직이라면 일단 보고 시작하자.

▲ 영화 <오감도> 티저포스터
감상하셨는가. 어떤 자극인가. 야릇한 반응인가? 몸을 타고 흐르는 전율까지 느꼈나 혹은 대수롭지 않은 그저 그런 비주얼에 불과하다고 느꼈나. 뭐라고 대답한들 절대 문제 삼지 않으려니 머리 굴리지 말고 솔직해 보자.

제멋대로 들쑥날쑥, <오감도> 포스터를 보다

“하나도 야하지 않아.”(20대, 남)
“내겐 야함의 개념이 없어. 강렬한 것으로 치면 <바람난 가족>의 포스터가 한 수 위지.”(40대, 남)
“야한데요. 다른 영화 포스터보다. 이렇게 야한 경우는 없었던 것 같은데.”(20대, 여)
“부러운데요.”(20대, 여)
“이쁘다 몸이, 근데 전혀 에로틱하지는 않아.”(30대, 여)
“오나전 캐감동, 아름다워…영화제목은 오감도, 포스터는 육감도…관객의 육감으로 오감도를 관람하고 싶어지는 포스터.”(30대, 남)
“그냥 침대 위 여자, ‘오감도’라는 글자가 신기하네.”(20대, 남)

당신은 어떠했나? 성인인증까지 하는 수고를 마다지 않고 <오감도> 포스터를 ‘강제 관람’한 내 주변의 반응은 이렇게 들쑥날쑥이었다. 누구는 “캐감동”이라며 “육감으로 오감도를 관람하고 싶어지는 포스터”라 극찬(?)을 했고, 다른 누군가는 포스터 속 여성의 몸만을 들여다 볼 뿐이다. 부럽다, 이쁘다며. 또 다른 누구는 포스터가 영화를 제대로 설명하는지 모르겠다며, 포스터가 메시지를 담기보다는 그저 마케팅만 역력한 전략이라며 꼬집었다. 누구는 ‘야하다’는 <오감도>의 포스터가 다른 이에게는 감성보다는 이성을 작동하게 만드는 이미지로 읽혔다.

세상이 그렇다니까. 그렇게 제각각의 모양으로 살아간다. ‘까페라떼’보다는 ‘카라멜마끼아또’를 좋아하는 ‘용녀’와 ‘영희’, 용녀는 ‘하이힐’보다는 ‘플랫슈즈’를 선호하고, 영희는 ‘하이힐’ 마니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용녀와 영희는 ‘조인성’보다는 ‘원빈’이 잘생겼다고 맞장구치며 좋아할지도 모를 일이다. 별일 없이, 제 멋에 산다.

그래서 한 장의 포스터를 본 이들의 반응에서 재미있는 건, 그/녀들의 라이프스타일과 코딱지만한 정도라 할지라도 그/녀들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는 점뿐일지도 모른다. 한 장의 포스터를 둘러싼 시시콜콜한 수다와 서로의 차이를 드러내는 표현의 각축이 우리네 삶의 문화를 구성한다.

심의? 우리들은 생각보다 영리하게 살아간다

걸림돌은, 바로 ‘심의’뿐이다. 아예 없애버리라고 하면 쏟아져 나올 비난에 간덩이가 콩알만해지는 나는 작은 마음이다. 적당히 타협을 해봐야 할 텐데…. 타협할 방법이 마땅찮다. 하여간 <오감도> 포스터는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로부터 ‘심의 반려’를 받았다. ‘전신누드’가 이유다. 영등위의 ‘광고·선전물의 청소년 유해성 확인기준’에 의하면 <오감도> 포스터는 마땅히 심의 기준에 위배된다. 제3장 10조 2항, ‘남녀의 둔부·항문, 성기·음부·음모 또는 가슴을 자세하게 선정적으로 묘사하거나 신체 또는 성기구 등을 이용한 자위행위를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에 해당된다. ‘심의’는 세금으로 하는 일이고, 영등위는 자기의 일을 했을 뿐이라고 고개 빳빳하게 세울지도 모른다. 나는 작은 마음일 뿐이지만, 그래도 할 말은 있다.

‘남녀의 둔부, 항문, 성기, 음부, 음모, 가슴 등’은 몸의 담론과 상품화가 이중으로 펄럭이는 오늘날에도 어찌 ‘에로틱’한 무엇으로만 읽히는가. 너도 있고, 나도 있는 그 흔하디 흔한 신체의 일부일 뿐인데. 차라리 아담과 이브를 원망해야 하는 건가. 이렇게 말해도, 이성의 엉덩이를 본다면 아마도 깜짝 놀라버릴 텐데, 그렇담 ‘심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 건가. 언론학자 전규찬은 심의에 대해 “심의는 검열과 절대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서로 정반대되는 개념이다. 그것은 대화적인 것과 일방적인 것, 숙의(熟議)적인 것과 억압적인 것, 이성적인 것과 폭력적인 것의 대비다. 심의가 자아와 타자간의 대화라면, 검열은 상대편을 배려하지 않는 자아의 독백이다. 결국 심의는 자신을 최대한 타인의 입장에 놓아보는 상상력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심의는 ‘대화’이고, ‘수다’(이어야 한)다. 결정적으로 심의가 검열이 아닌 사회의 운영 수단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제멋의 표현을 떠들어대는 과정과 이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

<오감도> 포스터를 보며 느낀 20대 여성과 30대 여성의 반응을 보며 모든 심의를 누군가들이 대신해주지 않아도 될 만큼 각자 영리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살아감의 제멋들을 포착할 수 있다. 이쯤 되면, hot커피보다는 ice커피를 선호하는 이와 ice커피보다는 hot커피를 좋아하는 이가 한 테이블에 앉아 hot커피와 ice커피를 시켜놓고 <오감도> 포스터에 대해 ‘이쁘다’ ‘야하다’ '별로다‘ 떠들어대는 수다가 어울린다.

그렇게 ‘심의’를 대신해주지 않아도 좋다

물론, ‘심의’가 ice커피, hot커피 운운하며 끝날 문제라면 그저께 즈음 영등위도, 방송통신심의위원회도 모두 사라졌을지 모른다. 규정과 사회 시스템으로 존재하는 ‘심의’는 매순간 ‘골칫거리’이며 동시대 표현력의 각축장이다. 물론 나 역시 <오감도> 포스터를 ‘심의 반려’했다고, 지금의 ‘심의’가 ‘검열’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이번 <오감도> 심의 반려 논란에서 무엇보다 우스운 것은, 18세 관람가 영화에게도 전연령 관람가 포스터를 만들라고 하는 모습이다. 대체 어쩌란 말인가. 영화는 <오감도>인데, 포스터는 <방귀대장 뿡뿡이>로 만들 수 없지 않은가. 결국 <오감도> 제작사가 온라인을 통한 성인인증 서비스로만 포스터를 노출했다 하더라도, 흐르는 게 일이요, 퍼나르는 게 특기인 인터넷에서 성인인증 따위는 거추장스러운 액세서리밖에 더 되겠는가.

그렇다면, <오감도>와 같은 시간에 검색어로 떠오른 윤은혜의 ‘섹시’ 화보는 또 어쩔 셈인가. ‘농염’한 분위기에 ‘파격적’인 화보로 ‘섹시미’를 발산했다는 윤은혜는 패션 매거진 <더블유> 5월호를 통해 ‘키스’ ‘혼욕’ ‘밀애’라는 언어로만 설명되는 ‘도발’적인 화보를 찍었다. 지금도 인터넷 구석구석을 후끈, 장식하고 있다. 모순되지 않은가. 눈 가리고 아웅하지 않냐 말이다.

제작사의 전략이고, 언론매체의 선정성이라는 구태의연한 평가는 일단 집어치우자. 딱 한마디만 하겠다. 세상 모든 도덕을 온전히 지키겠다는 불타는 사명감으로 세상 모든 것들을 심의하겠다고 덤벼봤자 필패할 뿐이다. 당신의 그 책임감 과잉이 더 야하다. 그렇게 ‘심의’를 대신해주지 않아도 좋다. 그 쑥덕공론의 시간에 차라리 동시대의 표현력에 대해 격렬하게 수다를 떠는 일에 귀 기울여볼 것을 권한다. 구멍 숭숭한 심의제도의 허점과 하나의 감정만을 강요하는 회귀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그 모든 문화적 제약을 뒤엎을 수 있는 생산적인 놀이는 이미 진행되고 있으니 말이다.

내친 김에 보너스다. 윤은혜 화보까지 몇 컷 더 감상해보고, 댓글 놀이나 하며 ‘대화’나 해보자.

▲ 패션 매거진 ‘W’에서 공개한 윤은혜 화보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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