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내용이 화제이다. 원래 광복절 경축사는 전통적으로 외교적 문제에 무게를 두는 메시지를 내놓는 경우가 많으나, 이번 경축사의 핵심은 국가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기에 그렇다. 특히 인터넷 공간을 점령한 ‘헬조선’, ‘개한민국’ 등의 자학적 언어들이 대통령이 직접 일침을 놓았다는 점에 관심이 집중된다. 그러나 정치 현안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리더십의 정권이 과연 국민들에게 ‘낙관’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조선일보 16일자 사설

조선일보는 16일 지면에 박근혜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내용을 비중있게 다루고 <광복 71년 성공한 나라에 넘치는 자기 비하와 부정> 제하의 사설에서 한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문제라는 취지의 주장을 내놨다. 조선일보는 이 사설에서 “불신과 부정의 말들이 난무하는 데 이유가 없지 않다”면서도 “하지만 ‘헬조선’이나 ‘개한민국’과 같은 말에서 느껴지는 우리 사회에 대한 혐오는 사회 현상에 대한 합리적 문제의식을 넘어선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선일보는 “사람들, 특히 청년들이 ‘헬(지옥)’이나 ‘흙수저’ 같은 말에 주저앉아 세상 탓만 하는 풍조가 만연하면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불신과 퇴행의 확대재생산만 부를 것”이라면서 “사회문제는 활발하게 비판하되 과도한 자기 비하나 의도적인 자기 혐오가 여론을 지배하는 풍토는 막아야 한다. 일부 정치인과 세력도 이런 정서에 편승하거나 영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소 국가 정체성을 너무나 중요시 여겨 <인천상륙작전>과 같은 영화에 대한 비판을 불편하게 생각해 온 조선일보 입장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일침’이 반가울 수 있다. 그러나 사회와 체제에 대한 자기비하의 풍조가 만연하고 있는 것은 정치가 해결해야 할 현안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16일자 사설

같은 지적은 심지어 보수언론 내에서도 나오고 있다. 동아일보는 이날 <‘헬조선’ 비판한 8·15경축사, 자긍심 키울 리더십이 빠졌다>는 제목의 사설에서 ‘헬조선’이니 ‘흙수저’니 하는 자기인식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대통령의 문제의식에 동의한다면서도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지난해 메르스 사태를 거치면서 급부상했고, 무능한 불통 정부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면서 지난 4·13총선에서 정부 여당에 대한 심판으로 귀결된 점을 떠올린다면 신조어만 탓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정부인데 대통령은 이것을 모르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동아일보는 국가경쟁력을 정부가 깎아먹고 있고, ‘관피아’ 낙하산 문제도 여전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박 대통령은 ‘모두가 남 탓을 하며 자신의 기득권만 지키려 해 공동체 의식이 실종됐다’고 지적했지만 경축사부터 ‘남 탓’만 있고 박근혜 정부와 대통령 자신에 대한 자성이 빠진 것이 아쉽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는 또 박근혜 대통령이 “법을 불신하고 경시하는 풍조 속에 떼법 문화가 만연했다”고 한 것에 대해서도 “불신풍조를 만든 것은 특권 의식과 도덕적 해이에 빠진 사정·사법기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면서 “‘민정수석 우병우-검사장 진경준-넥슨 김정주’의 특권 커넥션 의혹은 법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아이콘이 됐다”고 지적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개각을 단행하였는데, 위에서 언급한 우병우 민정수석 문제가 아직도 ‘깜깜이’라는 점은 동아일보의 이러한 지적에 힘을 실어준다. 대개 언론은 대통령이 개각 인사를 발표하고 난 이후 특별감찰 결과가 나오는 23일께 우병우 민정수석 거취가 결정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실제로 일부 언론을 보면 우병우 민정수석 후임이 물색 중이라는 정황에 대한 소문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중앙일보 16일자 사설

중앙일보는 이날 <검찰 출신 민정수석으론 민심 못 읽는다> 제하의 사설에서 각종 탈법 행위와 도덕성 관련 의혹을 받는 우병우 민정수석이 장관 후보자들의 재산 형성 과정과 이력, 도덕성 등을 검증하는 것에 대해 “한편의 슬픈 희극과도 같다”고 지적했다. 중앙일보는 “박근혜 대통령도 이 같은 비판 여론을 의식해 측근들의 의견을 수집 중이라고 한다. 법조계에선 벌써부터 우 수석의 후임자를 놓고 하마평이 나고 있다”면서 “하지만 거론되는 인사들의 대부분이 대구·경북 출신의 전·현직 검찰 고위 간부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중앙일보는 “1000억원대의 건물을 거래하고, 법인 명의의 최고급 외제차를 굴리는 수백억원대의 자산가가 ‘정의사회’를 외치는 것을 국민은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하겠는가”라며 “민정수석은 서민들 삶의 현장을 사심 없이 투명하게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맡아야할 자리”라고도 지적했다.

보수언론들의 보도 태도를 볼 때 우병우 민정수석의 거취 문제는 어느 정도 정리돼가는 과정으로 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보통 다른 공직자 같으면 바로 사의를 밝혔을만한 일을 이렇게까지 질질 끄는 것은 이해를 할 수 없는 대목인 게 사실이다. 더군다나 특별감찰의 결과가 사실상 ‘문제없음’으로 나올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잘못은 밝혀진 게 없지만 국정에 누가 돼 사임’이란 형태로 우병우 수석의 명예를 지켜주겠다는 것도 국민들의 눈으로 볼 때는 ‘헬조선’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될 거라는 것 역시 불을 보듯 뻔하다.

‘헬조선’으로 대표되는 국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단순한 ‘자기비하’적 감정이 아니다. ‘헬조선’은 단지 현재를 살아가는 게 힘들다는 것 뿐 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개선되지 않을 게 확실하다는 ‘자포자기’의 정서에서 나오는 인식이다. 상황이 미래에도 개선되지 않는 이유는 위에도 언급했듯 정치가 문제를 해결하지 않기 때문이다. ‘헬조선’을 말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정치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이유는 정치가 공적 기능을 자임하기보다는 정치에 연관된 사람들의 사적 이득을 보장하는 핑계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15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1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축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상황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 등장하는 ‘일침’ 역시 기만적으로 보이는 게 사실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유독 긍정적인 국가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은 이른바 건국절에 대한 논란의 일면으로도 볼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에 이어 이번에도 ‘건국 68주년’이라는 표현으로 2년 연속으로 광복절 경축사를 통한 건국절 논란을 자초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일을 ‘건국절’로 주장하는 보수세력들은 그간 친일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등의 주장이 국가정체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근거가 되고 있다며 ‘건국절’을 기념하는 것으로 긍정적인 국가정체성을 형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해왔다. 박근혜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해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친일청산과 같은 문제를 현 시점에 논하는 것에는 상당히 세심한 접근이 필요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문제는 여태까지 친일청산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문제의식을 단지 민족주의적 감성의 발현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는 거다. 해방이 이뤄질 당시 형성된 기득권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현실인식과 그게 뭐가 잘못됐느냐는 보수세력의 항변이 건국절 논란을 양극단의 절벽으로 밀어 넣고 있다.

이런 상황에선 대통령이 아무리 ‘긍정과 도전의 정신’을 말하더라도 한쪽 편에 서있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국민의 절망과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지도자의 모습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대통령이 먼저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포기하는 게 문제해결의 출발이다. 우병우 민정수석 문제부터 속히 해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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