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의 한숨, 굴비의 비명”이라는 헤드라인이 비웃음의 대상이 됐었기 때문일까. 김영란법에 반대한 보수언론들은 정작 헌법재판소가 28일 합헌 결정을 내리자 미적지근한 반응으로 일관했다. 최근 고위층에 대한 부패스캔들과 국회에서의 후속조치에 대한 기대가 함께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29일 지면에 김영란법 합헌 결정을 계기로 부패 척결에 나서자는 취지의 사설을 배치했다. 김영란법은 지나치게 광범위한 영역에 대해 법적으로 규제하는 거라는 비판여론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부패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쓸 정도의 사회 환경에서 이렇게라도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에 상당한 일리가 있다. 보수언론들은 애초에 김영란법의 위헌성을 지적하였으나 헌법재판소가 합헌 결정을 하였기 때문에 그 대목에서는 할 말이 별로 없게 되었다. 그러니 기왕 만든 법을 잘 지켜보자는 취지의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 29일자 사설
중앙일보 29일자 사설

조선일보는 <‘김영란法 충격 요법’ 써서라도 윤리 선진국 올라서야 한다> 제하 사설에서 여러 논란에도 헌법재판소가 합헌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이 법에 대한 국민 지지가 폭넓고 강력한 현실을 감안했을 것”이라며 “국민 모두가 그동안 익숙했던 접대나 회식, 경조사 관련 생활 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가 온 것”이라고 썼다. 중앙일보 역시 <김영란법 합헌, 망국적 부패 척결 계기로 만들자> 제하 사설에서 “법 적용 대상이 ‘선택적 차별’이라는 일부의 비판이 여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법 제정의 취지를 적극 살려 망국적 부패 문제를 혁명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김영란법은 ‘사교’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은밀히 이뤄졌던 청탁과 부패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한 고육지책의 하나로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썼다.

물론 김영란법에 대한 반발 논리가 보수언론의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 있어 가장 용기있게 행동하고 있는 건 동아일보다. 동아일보는 이날 <헌재 김영란법 ‘합헌’…국회와 정부가 과잉입법 바로잡아야>란 제목의 사설에서 “국회는 헌재가 입법권을 존중해 내린 합헌 결정의 뒤에 숨지 말고 스스로 저지른 잘못을 결자해지의 자세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썼다. 그러면서 동아일보는 이번 결정이 내수경기의 위축을 불러올 수 있고, 현실과 동떨어진 과잉입법은 아무도 지키지 않아 사문화될 수 있다면서 “대통령과 국민권익위는 시행령을 속히 고쳐 허용되는 금품의 상한선을 현실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동아일보 29일자 사설

이후 국회에서 개정안이 제출되거나 정부가 시행령을 손볼 가능성을 내다보게 하는 대목은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사설에도 있다. 조선일보의 경우 김영란법 적용 대상에 공직자 신분이 아닌 언론인과 사립학교 교원까지 포함됐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언론 사학 못지않게 공공성이 강하고 국민 생활과 밀접하게 연계돼 있는 금융계 법조계 의료계와 대기업, 시민단체 역시 법의 대상에서 제외시킬 이유가 없다”고 썼다. 또 국회의원 등 선출직 공직자가 대상에서 제외된 것과 ‘이해 충돌 방지’ 조항이 잘려나간 것에 대해서도 국민의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앙일보 역시 “국회도 앞으로 관련 법을 손질할 경우 민간기업 임직원을 포함해 변호사 회계사 개업의 등 전문직군 종사자들도 법 적용 대상에 포함시키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썼고, 법 적용 대상에 선출직 공직자를 포함하는 문제와 이해 충돌 방지 조항이 빠진 부분에 대해서는 <부패 뿌리 뽑자는데 왜 국회의원만 봐줘야 하나>라는 사설을 따로 배치해 문제를 제기했다.

중앙일보 29일자 사설

거의 ‘몽니’에 가까워 보이는 부분도 있다. 조선일보는 <기업이 공무원 접대할 일 없게 해줘야 김영란법 성공할 것>이란 제목의 사설에서 기업의 인허가 관련 문의나 설명을 듣기 위해 관계자들이 공무원을 만나는 사례가 많다는 점을 거론하며, 김영란법에 의하면 정상적인 면담과 부정 청탁을 구분하기 어려워 공무원들이 몸을 사려 기업 활동이 위축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으나 아예 기업의 발목을 잡는 규제를 모두 없애고 여기에 관여하는 공무원들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쯤되면 ‘나만 죽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얘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 29일자 사설

이후 과정에서 실제로 법 개정안에 대한 논의가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조선일보 출신인 새누리당 강효상 의원은 이날 MBC라디오 <신동호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에 대해 “예상보다 더 유감스럽다”면서 “법률적 판단보다 여론을 의식한 여론재판, 정치재판을 한 게 아닌가 할 정도로 합헌을 전제하고 논리를 꿰맞춘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 강효상 의원은 “(김영란법을 용인하면) 조지 오웰에 나오는 빅브라더 사회도 용인될 수 있다”면서 자신이 국회에 제출한 개정안에 국회의원의 예외조항을 삭제하는 부분이 포함돼있고, 또 언론인과 사립학교 교원을 적용대상에서 제외하는 취지의 개정안도 제출돼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영란법 반대 논리의 단골 메뉴인 내수위축에 대한 우려 역시 언급됐다.

김영란법과 시행령 개정의 필요성은 여당 의원만 지적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날 YTN라디오 <신율의 출발 새아침>에 출연한 국민의당 황주홍 의원은 헌법재판소의 합헌 판결이 옳은 결정이라면서도 “김영란법의 취지는 검은 돈과 부정한 청탁이 오가는, 차떼기 등을 말하는거지 밥을 얼마짜리를 먹느냐, 선물을 얼마짜릴 하느냐의 문제는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시행령에서 정하고 있는 식사 3만원, 선물 5만원, 경조사비 10만원의 기준에 이의를 제기하는 셈이다. 황주홍 의원은 과도한 기준이 내수를 위축시킬 수 있다고도 언급하면서 현재 기준을 식사 5만원, 선물 10만원, 경조사비 20만원 정도 수준으로 바꾸면 어떻겠느냐는 제안도 했다. “시민사회 단체의 지도자들, 정당의 지도자들은 왜 여기에 빠져있는가?”라며 적용대상에 대한 문제제기도 했다.

어쨌든 보수언론과 정치인들의 반응을 볼 때 향후 국회에서 이 문제로 상당히 혼란스러운 국면이 조성될 것은 분명해보인다. 반드시 보수언론 소속이 아니더라도 일선 기자들이 취재 등의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김영란법을 피해갈 수 있는 온갖 ‘꼼수’들이 등장할 거라는 예상도 충분히 할 수 있고, 또 권력이 김영란법을 악용해 정치적 반대자들을 탄압할 수 있다는 우려 역시 근거가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근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및 진경준 검사장 관련 스캔들 등이 여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는 점 등을 보면 김영란법의 기본 취지 자체를 부정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보수언론과 정치인들은 법과 시행령 개정을 논하기 전에 애초에 사태가 왜 이렇게까지 됐는지에 대한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 취재를 하기 위해 밥을 꼭 ‘얻어 먹어야’할 필요도 없고, 정부 정책과 기업의 현실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꼭 선물이 오고 가야 할 필요도 없다. 정치와 언론이 바뀌지 않으면 이번에 국회에서 김영란법을 누더기로 만들어도 같은 논란이 또 불거질 수밖에 없다. 헌법재판소 합헌 결정으로 ‘김영란법 2라운드’가 열린 셈인데, 이번만큼은 문제를 말하기 보다는 법의 기본 취지를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 법 적용 대상을 줄이기보다는 늘려야 하고, 구체적인 금액과 관련한 기준도 최대한 낮게 규정해야 한다. 애초에 김영란법의 필요성에 공감했던 대통령도 정치권이 ‘꼼수’로 문제를 피해가지 않도록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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