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글을 통해 근대문학, 소설의 죽음을 공언한다. 그는 ‘문학은 영구혁명의 사회적 주체성’이라는 사르트르의 말로 근대문학을 정의하며, 정치가 떠맡을 수 없는 영역의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온 문학이 그 책임을 벗어던질 때 더 이상 문학은 문학이 아니라 ‘오락’이라고 말한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떠맡았던’ 그 부담으로부터 문학은 자유로워졌고, 우리도 더 이상 문학에 사회적 의무를 기대하지 않는다.

문학이 죽었다, 그것은 근대문학의 사회적 권위가 성립할 수 있었던 조건이 이미 해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사회적으로 수용되어 왔던 권위, 그 자체의 해체는 혁명과 같은 단절이 아닌 이상 훨씬 느리게 진행되며 그 과정 속에서 권위의 이용가치가 성립가치를 대신한다. 상품으로서의 문학은 아직 죽지 않았다. 오히려 상품으로서의 문학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 이외수 ⓒ KBS 해피선데이 홈페이지
지난 주 일요일, 개편된 해피선데이 ‘남자의 자격’에 소설가 이외수가 고정 패널로 출연했다. 그는 방송인이 되기 이전에도 ‘기인’이라는 작품 외적인 요소들로 충분한 상품성을 가진 베스트셀러 작가였고, 시트콤에서 연기를 하고 예능프로그램의 초대 손님이 되기 이전에도 많은 연예인들의 ‘존경하는 작가 선생님’으로 오르내리고는 했다. 그는 인생의 조언을 들려주실 ‘작가 선생님’에다 흥미로운 일화를 많이 가진 ‘기인’이며 문학의 권위를 내세워 방송을 꺼려하지 않는 ‘대중성’까지 갖추고 있다. 예능이 작가를 원한다면 그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이외수의 방송출연은 연예인들이 자신의 이미지를 재고하거나 작품을 홍보하기 위해 예능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학 시장도 예능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는 첫 출발을 알렸다. 이외수의 성공이 무섭게 소설가 황석영이 뒤를 이어 무릎팍 도사에 출연했다. 예능이 유명인을 출연시켜 얻는 시청률과 유명인이 예능에 출연해서 얻는 이해관계가 일치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작가의 예능프로그램 출연은 문학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의 권위를 내세워 상품으로서의 문학을 지속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한 번의 출연으로 얼마나 많은 매출을 올릴 수 있는지 알게 된 출판사가 베스트셀러 작가들을 가만히 둘리 없다. 베스트셀러 작가들은 더욱 더 시장을 독점할 것이고, 작가 발굴의 기준 역시 상업성에 기반 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그 작가들의 작품을 ‘좋은 작품’으로 소개받을 것이다.

예능프로그램은 사회적 검열이 허용하는 한에서의 재미와 그 재미가 허용하는 한에서의 진지함을 기반으로 한다. 예능이 아무리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다고 한들 예능에게 우리는 어떤 사회적 의무를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한 때 문학이 감당했던 정치가 떠맡을 수 없는 사회적 영역은 현재 무엇이 감당하고 있을까? 어쩌면 그 자리는 지금 공석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책임은 대체 누가 져야하는 것일까?

문학이 죽든 살든 분명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문학이 더 이상 이전의 시대처럼 사회적으로 생존할 수 없다고 해서 문학의 내면성이 생존할 수 없다는 조건은 아니니까 말이다. 오히려 우리가 아직도 문학의 권위를 재생산해내는 지점이 문제다. 문학은 지금 어떻게 생존하고 있는가? 이외수가 예능인이 될 수 있는 그 지점, 그리고 이외수의 최신간이 모두 옛 소설의 개정판인 그 지점. 비단 문학 뿐 아니라 이전 시대의 모든 사회적 권위들에 대해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아직도 그것의 권위가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은 유효한가? 아니라면 그 권위의 ‘종언’을 고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그 사회적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지 질문해야 한다. 혹시, 우리 자신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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