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일이면 날짜만으로도 경외롭다. 언론사(史)에서 견줘 앞설 만한 건 2001년 CBS 투쟁과 2004~2007년 희망조합(OBS) 투쟁 정도뿐이다. YTN 투쟁은 그 자체로 역사다. 대통령 특보가 사장으로 와서는 안 된다는 소박한 상식에서 출발했다. 이렇게 길고 험한 싸움이 될 줄 알았다면 쉽게 시작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졌다 다시 무거워지고 거듭 무거워진 다음 차츰 가벼워지는 걸 보며 계절의 변화보다 거친 시간의 흐름을 먼저 느꼈다. 그 시간에 쓸려 우는 모습도 많이 봤다. 따라 울진 못했지만, 그들의 기발하고 발랄한 투쟁전략과 전술은 드물게 나를 웃을 수 있게 했다. 고맙다. 많이 보고 배웠다.

▲ ⓒ송선영
그러나 기발하고 발랄한 투쟁도 칼날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정직되고, 해직되고, 마침내 구속까지 되었다. 총파업투쟁에 들어간 현직 노조 위원장이자 얼굴이 널리 알려진 방송 앵커가 경찰 출석일까지 약속해놨는데도 일요일 아침 가족들 앞에서 잡혀갔다. 증거 인멸 및 도주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이 발부돼 갇히는 신세가 됐다. 그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보며,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희극적 야만’의 세상인지를 다시금 절감해야 했다. 그래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최소한의 합리성도 기대할 수 없는 세상에 질렸을 수도 있겠다 싶다. YTN 노조가 별안간 투쟁을 접었다. 그리고 노종면은 석방됐다.

지난 2일 오전 YTN 총파업 정리집회에서 사회자가 “우리는 승리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관찰자’의 처지에서 처음 전해 들었을 때는 조금 황당했다. 그래서 씁쓸한 자위적 레토릭일 거라고 짐작했다. 좀더 생각을 굴린 다음에는, 지난 259일을 ‘승리적’으로 해석해 앞날을 과학적으로 전망하기 위한 ‘기억투쟁’일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위원장이 석방되도록 하는 게 가장 급선무였다”는 노조 관계자의 말을 전해 들으면서 장엄한 시대극에서 순식간에 멜로로 끝나버린 드라마를 보는 듯했다. ‘노종면 석방’을 승리로 규정하는 건 혁명은 실패했어도 사랑만 이뤄지면 탄탄한 플롯의 해피엔딩이라고 평론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거듭 말하거니와, 나는 YTN노조의 지난 259일을 경외한다. 현실적인 투쟁동력을 보태주지 못한 부채감도 있다. 그리고, 이젠 어떤 식으로든 투쟁을 마무리해야 할 국면이라고 전략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나, 승리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회사 쪽과 협상을 전술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나, 판단의 문제라고 봤다. 하지만, 결과물은 그것에 못 미쳤고, 과정은 본질과 거리가 멀었다. 노종면의 구속적부심에 맞추기 위해 노조는 해직자 복직 합의마저 포기하고 ‘적대 행위 일절 금지’의 무장해제를 받아들였다. 노조는 노종면 구속이 ‘청부 수사’라고 하면서도 결과적으로 청부의 주체인 회사 쪽에 모든 걸 다 내어주고 선처를 호소한 꼴이 됐다.

▲ 4월 2일 서울구치소 앞에서 노조원들이 석방된 노종면 지부장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다. ⓒ송선영
노종면은 석방됐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그에게 석방은 ‘위치 이동’의 의미 이상이 아니다. 그는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를 받아야 하고, 기소될 수도 있고, 유죄 판결을 받을 수도 있다. 그 ‘위치’가 그토록 결정적인 변수였다면, 구류/금고/징역의 형이 내려지는 순간 그마저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물론 상식에서 벗어난 가정이지만, 여태껏 한 번도 상식이 지켜지지 않은 것 또한 엄중한 경험칙이다. 무엇보다 MB특보 낙하산 사장 반대와 공정방송 사수를 내걸고 259일 동안 투쟁해온 노종면에게는 구치소만 감옥이 아닐 수도 있다. 명분을 내려놓고 나온 바깥세상이 어쩌면 그에게 더 큰 감옥이 될지도 모른다.

구본홍은 드디어 낙하산 배낭을 벗고 YTN에 완벽하게 ‘착지’했다. 점령군 사령관에겐 견제세력이 없다. ‘적대적 행위 일절 금지’는 합의가 아니라 포고령이다. 그의 인격과 품성, 혹은 취향이 내부 구성원들의 빛과 어둠을 가를 것이다. 그의 지난 259일은 점령전의 특수한 국면이어서 인격과 품성, 취향의 문제와 무관했다고 치자. 하지만 이번 협상 국면에서 회사 쪽이 한사코 해고자 복직에 합의하지 않은 것은 성격이 다르다. 회사는 과거에 대해 책임을 물은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해 쐐기를 박은 것이다. 맞서고 저항하는 행위에 대한 무시무시한 경고다. 회사는 합의서를 들이대며, 비판적인 구성원을 색출해, 분리하고, 배제하려 할 것이다.

나도 ‘패배’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허나 승리는 결코 아니다. 다만 승패는 아직 결정나지 않았다고 보고 싶다. 물론 이런 인식은 싸움을 계속한다는 전제 위에서만 성립한다. 3세트 1대2 경기를 5세트로 늘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의 싸움은 이전까지의 싸움과는 범주와 양상 모두 달라야 한다. YTN 노조는 ‘낙하산 반대’와 ‘공정 방송 사수’의 기치를 걸고 싸워왔지만, 내부 투쟁적 성격이 강했다. (심지어 ‘외부세력’이 YTN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은지 경계했다는 얘기도 있다.) 지금은 그 투쟁의 동력과 실효적 수단을 상실했다. 내부에서는 해법이 없다. 싸움의 범주와 양상이 달라져야 하는 건 그 때문이기도 하다.

YTN <돌발영상>이 포착한 장면은 ‘돌발적 단면’의 텍스트지만, 전달되는 콘텍스트는 이면에 존재하는 ‘구조적 진실’이었다. 좋든 싫든 YTN사태 역시 좌표 잃은 낙하산이 불시착한 돌발사태가 아니었다. 위기에 처한 당대의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와 넓고 깊게 닿아 있다. 여기에 맞서 싸우는 모든 세력은 YTN노조의 ‘외부세력’이 아니라 ‘확장세력’이다. 오는 6월 정점으로 치달을 언론관련법안 투쟁을 비롯해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둘러싼 힘든 투쟁들이 줄지어 서있다. 259일 동안의 투쟁이 간부선배들과 벌인 유별난 ‘애사심 경쟁’이 아니었듯이, 이들 싸움도 YTN과 무관한 외부 싸움일 수는 없다.

길고 힘든 싸움은 공포를 내면화하기 마련이다. 이겼느냐 졌느냐와는 상관없다. 어렵게 싸움에서 이기고도 조직이 무기력해지는 경우를 여럿 보아왔다. 내부 논리에 몰입한 결과다. 진 싸움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인식은 좁아지고 전망은 짧아지며 관계는 고립된다. 그러나 YTN노조가 아직 패배하지 않은 이상, 변화가 절실한 지금의 불리한 사태가 오히려 좋은 조건일 수 있다. YTN노조에게는 현 상황을 유동화하고 역전을 노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기회는 지금보다 더 넓은 광장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광장은 ‘희극적 야만’에 맞설 그대들의 재기발랄함과 끈질김을 필요로 하고 있다. 다시, 새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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