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있다. 그는 성접대를 재수의 문제로 봤다. 자신도 공보관 하면서 기자들 “접대 많이 해봤”단다. 그는 강희락 경찰청장이다. 그의 말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무튼 여기서도 그런 거 좋아하는 분들이 계시다”고 했다.

▲ 강희락 경찰청장. ⓒ송선영
파문이 커지고 있다. 경찰은 처음에 발언 자체가 없었다고 했지만, 발언 자체는 인정하고 있다. 단, 비보도를 전제로 한 농담이었단다. 오프더레코드이건, 농담이라고 발언한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발언의 사실 여부이다. 강 청장은 분명 발언을 했다. 발언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다. 그러나 보도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미디어스>가 확인한 사태 전개 과정을 재구성하고, 저널리즘 규범 차원에서 분석해 보았다.

지난달 30일 오전 강 청장이 발언을 한 것은 분명하다. 비보도 요청은 엇갈린다. 분명한 것은 비보도 요청이 발언 이전에 있었던 것은 아니란 점이다. 현장에 있던 기자의 보고를 받은 모 일간지 시경캡(서울경찰청을 출입하며 사건팀을 책임짐)은 발언 이후에 비보도 요청이 있었다고 했다. 오프더레코드 요청은 기자단 중 한 명의 기자라도 거부하면 성립되지 않는다. 적어도 당시 간담회 자리에 있었던 기자 누구도 오프더레코드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경찰청 출입기자들의 현장 정보보고를 전해 들은 <프레시안>은 취재를 거쳐 4월1일 강 청장의 간담회 석상 발언을 보도했다. 이에 따라 경찰청 출입 기자단은 회의를 거쳐 비보도를 풀고 각 사별로 알아서 대응하기로 결정했다. 원래 비보도 합의는 취재원과 해당 기자의 관계에서만 성립된다. 제3자가 보도하면 비보도 합의는 더는 성립하지 않는다.

프레시안이 처음 경찰에 확인 요청을 했을 때, 경찰청 공보관은 회의 중이라며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참 후 이뤄진 통화에서 ‘없었던 일’이라며,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프레시안은 기사를 하루 묵혔다. 경찰은 부인하고, 현장 기자들이 침묵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칫 ‘독박’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심하던 프레시안은 결국 4월1일 낮 12시 첫 보도를 내보냈다.

오프더레코드는 깨졌다. 따라서 당시 간담회 자리에 있었던 기자들의 보도 여부는 각 사의 판단에 맞겨진 것이다. 그러나 당일 저녁 방송뉴스는 물론 한겨레를 제외한 일간지 어느 곳도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 폭발력 있는 발언이었다. 강 청장의 얘기는 기자들에게 경찰 공보관 신분으로 성접대를 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파문이 확산되는 속도는 더디다. 현장에 있던 기자들은 아직까지도 일제히 침묵하고 있다. 한겨레 보도조차 사건 발생 이틀 뒤에야 이뤄졌으며, 후속보도는 없다.

▲ 한겨레 4월2일치 8면(사회)
직시해야 한다. 문제는 강 청장이 아니라 기자들이다. 강 청장은 기자들에게 ‘너희도 똑같지 않으냐’며 물귀신 작전을 썼다고 봐야 한다. 강 청장은 구체적인 시기까지 적시했다. 그는 “나도 여기 공보관 끝나고 미국 연수 준비하면서 기자들이 세게 한 번 사라고 해서 기자들 데리고 2차를 갔는데, 모텔에서 기자들에게 열쇠를 나눠주면서 ‘내가 참, 이 나이에 이런 거 하게 생겼나, 별 생각이 다 들더라”고 했다. 강 청장은 2001년 7월까지 경찰청 공보관이었다. 이후 2003년 8월까지 워싱턴 주재관으로 근무했다. 그의 발언이 사실이라면 그가 기자들을 데리고 모텔에 간 때는 아마도 2001년 여름일 테다.

경찰청 공보관은 경찰청 출입기자들과 함께 이들을 직접 지휘하는 시경캡들도 상대한다. 강 청장의 문제는 곧 2001년 여름 강 청장이 상대했던 기자들의 문제다. 뿐만 아니라 2009년 오늘 경찰청을 출입하며 현장에 있었던 기자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2001년 여름 어떤 이들은 강 청장이 돌린 ‘모텔 키’를 직접 받았고, 2009년 봄 어떤 이들은 그의 ‘회고’를 직접 들었다.

대개 접대의 경우 받은 ‘분’이 더 죄질이 나쁘다. 기자 윤리 차원에서는 현장에서 직접 보거나 들은 얘기에 침묵하는 것이 가장 나쁘다. 가장 나쁜 이 두가지가 지금 한국 언론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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