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레임덕이 시작됐다는 전조가 여기저기서 감지된다. 4·13 총선 패배 이후 여당의 자중지란과 공무원들의 잦은 일탈행위 등이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는 상황이다. 현직 대통령의 레임덕은 반드시 정권재창출을 위한 기득권의 계획에 ‘시동’을 걸도록 하기 마련이다.

여권에서 부각된 기존의 흐름은 반기문 UN 사무총장을 데려와 충청-TK연대를 현실화한다는 것이었으나 신공항 유치 무산, 사드 배치 등의 문제로 TK 민심이 요동치는 상황에서는 이 구상의 현실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반기문 사무총장이 이슈의 중심에 서서 독자적인 정치행보를 이어가기도 어렵다. 그가 내년 초까지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물적조건’이다. 기득권의 입장에서 보면 결국 플랜B 또는 대안을 만들어야 할 상황인데, 보수언론의 대표 주자인 조선일보가 여기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은 다소 이색적이다.

조선일보 18일자 지면

조선일보는 18일 지면에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인터뷰를 배치했다. 4·13 총선에서 낙선한 인사의 인터뷰를 이런 식으로 지면에 배치한 것은 이례적이다. 이 인터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비박 단일화를 포함해 역할을 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특정 계파에 기울어진 언행을 한 적이 없다”는 등의 발언이다. 이 발언이 놀라운 것은 지난 총선 국면에만 해도 오세훈 전 시장을 ‘친박이 미는 대권주자’로 보는 게 일반적 시각이었기 때문이다. 총선 당시 오세훈 전 시장 본인도 이러한 규정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는데, 선거가 끝나자마자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비박 커밍아웃’을 한 셈이다.

조선일보 19일자 지면

조선일보는 19일 지면에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을 비박계 일원으로 포지셔닝 하도록 유도했다. 5면 <“비박 당대표 만들자” 오·남·원 손잡았다> 제하의 기사에서 조선일보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새누리당 전당대회 대표 경선 출마를 공식화 한 정병국, 김용태 의원을 만나 후보단일화를 이룰 것을 강하게 설득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비박계 후보 당선을 위해 원외 당협위원장들을 규합하는 작업에 돌입했다고도 전했는데, 이는 막후에서 뛰어야 할 남경필 경기도지사와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지자체장 신분이라 선거 중립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남경필, 원희룡 등을 대신해 수도권 비박계의 대표주자로 나서고 있는 셈이다. 기사에 남경필, 원희룡 지사와 함께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얼굴 사진이 나란히 배치된 것은 이런 맥락 때문이다.

전당대회를 앞두고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대언론 접촉면 자체가 넓어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맥락을 보면 조선일보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대권주자로서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는 걸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 조선일보는 4·13 총선 국면에서 노골적인 ‘오세훈 띄우기’에 나서 총선보도감시연대 등의 비판을 받았다. ( ▶관련기사 <선거 앞두고 ‘오세훈 띄우기’ 나선 조선일보> ) 당시 조선일보는 오세훈 전 시장의 대권주자로서의 입지를 강조하며 명백하게 우호적인 보도를 지면에서 이어가는가 하면, 자신들이 운영하는 종편인 TV조선을 통해서도 ‘오세훈 대세론’을 유포하려는 다양한 노력을 선보인 바 있다.

만일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비박계 당권주자 단일화’를 위해 뛰고 있다면 TV조선에 고마워해야 할 상황이 됐다는 점은 현재 상황에 대한 나름의 직관을 제공한다. TV조선은 18일 친박계 핵심인 윤상현 의원이 서청원 의원 지역구인 경기 화성 갑에 공천을 신청한 김성회 전 의원을 밀어낸 정황을 보도했다. 윤상현 의원이 갖은 협박조의 문장을 동원해 김성회 전 의원을 ‘구워삶는’ 녹취록도 공개됐다. TV조선은 같은 날 밤 최경환 의원이 같은 방식으로 김성회 전 의원 공천 문제에 개입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의 여파로 당 대표 출마를 고민 중이던 서청원 의원은 불출마 의사를 밝히는 망신을 자초했다.

서청원 의원이 누구인가. 친박의 맏형이자 좌장이다. 그는 당 대표에 도전할 뜻이 별로 없었으나 전당대회를 앞두고 친박계 후보가 난립하면서 위기감을 느낀 일부 친박 강경파들이 읍소에 읍소를 거듭한 결과 출마 선언을 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렸던 걸로 알려져 있다. 애초에 출마 얘기가 없었다면 조용히 있다가 하반기 국회의장을 하는 걸로 정치인생을 마감하면 될 터였다. 그러나 TV조선의 활약(?) 덕분에 출마 선언을 하기도 전에 망신만 당하고 물러나는 이상한 처지에 내몰리게 됐다.

어찌됐건 이로써 친박계의 당권 장악 가능성은 다소 낮아졌다는 게 중론이다. 만일 이 상황을 앞서 조선일보의 ‘오세훈에 대한 배려’와 함께 묶는다면 의미심장한 그림이 그려진다. 서청원 의원 불출마 이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각고의 노력 끝에 비박계 후보를 단일화하고 승리하도록 만든다면, 이제 그 ‘비박계 지도부’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을 명실상부한 유력 대권주자로 대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중앙일보 등에 의해 잠룡 대접을 받았던 남경필 경기도지사 같은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지만, 여권 일반 입장에서 최소한 반기문 사무총장이 국내에 들어오기 전까지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조선일보가 나름의 ‘판단’을 갖고 있다면, 그 내용은 이런 식으로 대권에 근접할 수 있는 인물들의 구도를 만들어 정권재창출을 위한 판을 짜는 게 시급하다는 게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언론이 이런 식의 정치공학에 발을 걸치는 건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특히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잘못된 정치기획인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환호하고 이를 부추긴 ‘원죄’를 갖고 있다. 조선일보는 18일 인터뷰 지면을 통해 오세훈 전 서울시장에 이에 대해 변명할 기회를 줬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여기서 “시장직을 걸고 사퇴한 것은 잘못했다”면서도 주민투표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고 당시 논쟁 덕분에 ‘현금살포형 복지’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주장을 당당히 내놨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당시 포지션은 시장주의적 원칙에 기반한 경제에 가까웠다. 이명박 정부의 ‘부자감세’에 찬성했고, 2010년 박근혜 당시 의원이 감세 정책의 철회를 모색한 것에 대해서는 “한심하다”고 평할 정도였다. 그러나 차기 대권에 도전하려면 이러한 포지션으로는 아무래도 무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과거와 비교해 다소 ‘좌클릭’한 주장을 내놓을 것으로도 보인다.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스위스 발렌베리 가문 등을 언급하며 재벌이 소유한 부의 사회적 환원 유도와 상속세 및 기업 의결권 제도 개선 등을 언급했다고 한다. 또, 사회 격차와 불평등 해소를 위해 근로기준법 상의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헌법정신에 반영해 빈부격차를 해소해야 한다고도 주장한 걸로 전해진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이런 포지션 변화는 또 다른 비박계 대권주자의 한 명으로 꼽히는 유승민 의원 등의 포지션을 잠식하려는 의도로도 생각된다. 그러나 여전히 이명박 정부의 정책 기조에 찬성하고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추진할 정도의 급진적 우파 노선에 대한 반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이러한 변화는 그저 ‘꼼수’ 정도로나 비칠 뿐이다. 가치에 기반한 철학도 없으면서 오늘 얘기 다르고 내일 얘기 다른 사람들 대권주자로 띄우는 건 언론과 정치의 윤리 모두에 위배된다. 최근 우병우 민정수석에 대한 연속 보도로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는 조선일보의 ‘큰 그림’을 마냥 좋게 봐줄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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