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서강대에서 흥미로운 행사가 열렸다.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 Basic Income Earth Network) 16차 대회다. 기본소득은 국민 모두에게, 개인별로, 노동의무와 같은 조건없이 일정한 소득을 보장하는 것이다.

기본소득의 사상적 기원은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본주의 초기단계였던 모어의 시대, 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고 부랑자로 전락하면서 도적과 약탈 등이 빈발했다. 지배층은 사회규율의 확립 내세워 극형 일변도로 대응했다. 그는 지배층의 무능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기본생활 보장을 제시한다.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20세기 들어서다. 그 첫번째 선구자는 영국의 사상가 버트란드 러셀이다. 그는 아나키스트들의 아이디어에서 힌트를 얻어 조건없는 즉, 노동의무를 부과하지 않는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기본소득은 60년대 미국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제임스 토빈을 필두로 여러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이 기본소득을 지지했다. 신자유주의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밀턴 프리드만도 그 대열에 가담했을 정도다. 흑인 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은 암살 직전 '빈자들의 운동'을 계획하면서 기본소득의 보장을 요구했다. 정치권도 나섰다. 닉슨 대통령은 가족단위로 일정한 소득을 보장하는 가족지원프로그램을 추진했다. 197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맥거번은 더 야심찬 기본소득공약을 준비했지만 패배로 빛을 잃었다. 이 흐름은 비록 완결되지 않았지만 많은 흔적을 남겼다. 기본소득과 비슷한 보충안정소득 정책이 도입되었고, 알라스카주는 1982년부터 자원개발에서 나오는 재원을 활용해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있다.

1986년, 벨기에의 루벵 신도시에 학자와 활동가들이 모여 기본소득 컨퍼런스를 열었다. 이를 계기로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가 구성되었고, 2004년 지구네트워크로 확대되었다. 기본소득운동은 최근 폭발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론적 성과도 있고, 여론주도층과 언론의 관심도 높아졌다. 스위스에서 국민투표를 이끌어냈고, 아프리카의 나미비아와 인도에서 시행한 시범프로젝트는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녹색당 등 소수당이 기본소득을 정치적 의제로 만드는데 앞장섰지만, 주요 정당들도 공감하기 시작했다. 핀란드의 주요정당들은 기본소득 도입에 원칙적으로 합의하고 내후년부터 시범프로젝트를 실시하기로 했다. 유럽과 남미의 여러 나라에서 기본소득 실현을 위한 입법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심지어 중국에서도 지방정부 차원에서 초보적 수준의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있다.

이 갑작스러운 폭발의 일차적 진원지는 전지구적 의제가 된 불평등과 빈곤의 문제일 것이다. 이번 대회 개회식에 참가한 김종인 더민주 대표도 축사에서 극심한 볼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기본소득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토론 세션에 참가한 이정우 교수는 저성장과 양극화의 늪에 빠진 한국경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본소득과 같은 혁신적인 방안을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11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 센터에서 열린 '독일이든 한국이든, 세계는 지금 기본소득이 필요하다.' 독일 좌파당-한국노동당 공동 기자회견에서 카티아 키핑 독일 좌파당 대표(왼쪽)가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인공지능의 등장은 또 하나의 진앙이다. 기본소득 초기 논의에서도 자동화에 따른 실업이 문제의식 가운데 하나였다. 자동화가 기존의 일자리를 감축하는 정도라면, 인공지능은 수많은 직종을 아예 없애버릴 것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완전고용 즉, 일과 연계된 기존의 복지 시스템은 더이상 작동하지 않을 전망이다.

기본소득이 불평등과 빈곤을 줄이는데 결정적 효과가 있고, 관리비용이 거의 들지 않아 효율성이 높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시범 프로젝트를 통해 입증되었다. 반론은 재원과 노동의욕 감소이다.

재원 문제에 대한 기본철학은 자원배분이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천연자원이나 지식처럼 그 사회가 공동으로 소유한 유형무형의 자산에서 나온 수익을 공평하게 누릴 자격이 있다고 본다. 천연자원에서 나오는 이익으로 기금을 만들어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알라스카 모델은 바로 이 철학에서 나왔다. 노벨상을 수상한 허버트 사이먼은 소득의 90%가 이전 세대에 의해 축적된 지식을 활용한 것이므로 모든 소득에 70%의 세금을 매겨 기본소득 재원으로 활용하자는 주장을 했다. 한국기본소득네트워크의 강남훈 대표는 이번 대회에서, 최근 떠오른 인공지능이 사람들이 제공하는 빅데이타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50%의 과세를 해 기본소득 재원으로 쓰자는 발표를 했다. 기본소득이 '시민배당'으로 불리기도 하는 까닭이다.

독일의 한 기본소득 활동가는 '게으른 베짱이는 없다'는 한마디 말로 노동의욕감소 우려를 일축했다. 기금을 만들어 선발된 사람들에게 기본소득을 일정기간 지급해본 결과 수혜자 가운데 단 한사람도 일을 중단한 사람이 없다고 한다. 나미비아와 인도에서 진행된 기본소득 실험에서도 오히려 일자리와 소득이 늘어난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기본소득이 불평등과 빈곤에 대한 대책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지만 기본소득의 이론가들은 '자유'의 문제에 더 주목한다. 러셀은 노동이 삶의 목적일 수 없다는 말로 노동을 신성시하는 통념을 공박하면서, 노동의 의무 없이 기본생활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소득이 보장된다면 사람들이 더 큰 자유를 누리게 되면서 공동체 전체를 위해 꼭 필요한, 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하게 될 것이라 했다. 기본소득운동의 핵심 이론가인 필립 판 파레이스는 기본소득에 대한 철학적 옹호를 담은 그의 저서 제목을 <모두에게 실질적 자유를>이라 붙였다. 일찌기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했듯이 빈곤은 자유의 적이다. 불평등이 문제인 까닭도 그 자체로 악이지만 동시에 소수의 탐욕을 위해 다수의 자유를 빼앗거나 억압하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은 불평등과 빈곤을 줄이는데 효과적이므로 결국 이를 통해 러셀이 말한 <자유로 가는 길>을 열게 될 것이다.

월드와이드웹(WWW)을 만든 팀 버너스 리는 기본소득이 "기술이 가져온 대규모 지구적 불평등을 교정할 수 있는 수단의 하나"라 말했다. 그외에도 여러 저명한 IT 거물들이 기본소득을 지지한다. 미국 상원은 기본소득에 대한 청문회를 시작했다.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없지만 불평등을 해소하고 앞으로 곧 닥칠 인공지능시대에 대비하기 위해 지금부터 준비가 필요하다는 취지다. 불평등에서 미국과 앞자리 다툼을 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무엇을 하고 있나? 국회든 정부차원에서든 뭔가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우리의 미래가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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