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연 사건이 주말을 지나며 연예계는 물론 미디어 업계 전체를 덮치는 뇌관으로 타오르고 있다. 이렇듯, 죽어야 하는 자는 살고 죽을 이유가 없는 자가 죽는 것을 ‘관행’이라 한다면 결코, 문명화된 사회가 아니다.

장자연의 친필 문건으로 추정되는 편지에 등장하는 성상납, 술자리 접대, 감금, 구타 등은 형법이 규정하는 악랄한 범죄행위이다. 그 편지에만 방송사 PD, 기획사 임원, 언론계 인사 등 사회 유력인사 10여명의 실명이 기재되어 있고, 추가적인 내용이 있는 제3의 문건도 추적중이라고 한다.

그녀가 소속사를 옮기려 했건 말건, 두 엔터테인먼트 회사 사장간에 송사가 있느냐 없느냐, 그 문건을 보도하는 것이 적절했느냐 등의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고인을 가슴에 묻은 유족마저도 경찰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 문건이 사실이라면, 이건 자살이 아니라 살해이다.

▲ 경향신문 3월14일자 8면

손에 칼을 쥐어야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게 아니란 건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테다. 경찰이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럽다. 경찰의 의도가 무엇이건 간에, 이왕지사 27명으로 구성된 대형 수사본부를 꾸렸으니, 최대한 빨리 그리고 엄중하게 사건을 다뤄주길 바란다. 이번이야말로 ‘실용’적 관점에서 ‘법치’를 실현할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는가.

맞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하고 있는 당연한 말이다. 워낙에 관련 기사와 글들이 쏟아지고 있으니, 구차한 말들은 중언부언이 되고 말 것이다. 주말내 흥미진진한 사생활 스캔들 혹은 오랜만에 등장한 연예가의 추문을 신났다고 활자화해내는 기사들을 얼핏얼핏 ‘관음’하며 내내 고민스러웠다. 내내 한 가지 질문이 머리를 맴돌았다. 과연, 장자연 사건은 이렇게 보도되고 또 저렇게 예정된 결말로 치달으면 되는 것일까. 질문을 좀 인문학적으로 풀이하면 이렇다. 연예인 인권은 특수한 것인가, 보편적인 것인가?

‘연예인’은 오랫동안 사회적 영역 바깥에 위치하는 또 다른 타자(the other)로 간주되어 왔다. 이와 관련하여, 미디어학자 전규찬은 연예인을 “팬(fan)들의 거리낌 없는 수다 대상이자 실제 현실 공간과 사이버 공간의 구분 없이 제어되지 않은 일방적 응시의 상대이며, 경외시되면서 동시에 존중받지 못하는 이중 시선의 목표물”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다소, 뜬금없는 논의라 생각되겠지만, 이번 사건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고민해봐야 할 대목이 바로, 연예인의 인권 혹은 연예인의 사회적 존재 양식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세계인권선언> 1조가 이미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고 규정하였는데, 어찌 연예인이라고 인권이 특수하겠냐고. 하지만 이상은 고귀하고 이론은 이론일 뿐,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번 사건을 일찌감치 ‘연예산업의 천박한 시스템’ 탓이라고 규정짓고 있는 많은 보도들이 우선 그러하다.

대중을 추수하려는 대개의 논리들은 연예인을 ‘모든 사람’의 범주에서 배제한다. 연예인 관련 어떤 사건이 터질 때마다 반복되는 보도의 문법은 연예인을 인권이 침해당한 ‘사회적 약자’라기보단, ‘영화와 부귀’에 값하는 고통을 감내하다 사고를 낸 대상으로 인식한다. 그러곤 곧장 검증되지 않지만 실체적인 연예산업의 구조적 시스템 문제로 넘어가버린다. 말하자면, 연예인 그리고 그와 관련된 스캔들 보도가 ‘인간’으로서 연예인들의 정신적, 신체적 상태에 관한 문제로 온전히 성립하는 경우는 없다는 말이다.

보도는 대중의 심리 그리고 특정 사안을 바라보는 사회의 보편적 시선을 반영한다. 장자연 보도를 보고 있노라면, 오로지 미디어의 관심은 ‘연예인’의 신체를 중심으로 한 외설적 시선과 ‘가해자’의 신상뿐이다. 연예인의 인권은 부차적으로 거론되거나, 매우 특수한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그러한 보도는 실명이 거론된 사회 유력인사 10여명이 그녀를 짓밟은 것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침해적인 것이다.

인간으로서 보호받아야 할 마땅한 것들이, 부와 명예를 지닐 수도 있는 특수한 직업이기 때문에 침해되고 더욱이 은폐된 상황, 그걸 어떻게 보도해야 할까? 우선, 지금의 보도가 밀물이 밀려오듯 미디어의 조명을 받고, 선정적으로 보도되다, 어느 순간쯤에 썰물이 빠져나가듯 식어버리는 식의 인습적인 절차는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무엇보다 장자연 신체에 드리워져 있는 외설적인 시선을 거둬야 한다. 그리고 문제를 연예인 일반의 문제로 확대해야 한다. 기준은 물론, 보편적 노동권 상식으로서 인권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 죽음이 대단히 특별한 것이라면, 그것은 그녀가 연예 산업의 희생자여서가 아니다. 이미 해결되었다고 믿어왔던 근본적 인권의 문제들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리라. 연예기획사에 계약으로 종속되어 사생활이 유린당하고 신체적 구속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착취와 억압의 상황은 오늘도 계속된다. 별이 되고픈 욕망을 좇는다는 이유로 모든 불합리와 차별을 일단, 감내해야 하는 노동조건은 타당한가? 오늘 밤에도 토크쇼에선 연습생 시절의 노동착취가 ‘추억’이란 기억으로 미화된다. “존중받지 못하는 이중 시선의 목표물”은 과연, 장자연 뿐인가?

* 본 글은 문화연대에서 2005년 3월 3일 진행한, <연예인 인권의 새로운 이해>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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