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윌프레드 버체트(1911~1983).
베트남 전쟁 당시, 서방의 한 기자가 베트남 민중의 영웅 호치민과 나란히 앉아 질문을 건넨다. “대통령께선 이 전쟁에 대해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십니까?” 호치민은 훗날 프랑스 TV에 방송된 이 인터뷰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못 이깁니다. 남베트남에서 우리 북베트남을 폭격한다고 해서, 이 전쟁에서 이길 수는 없습니다. 결코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우린 항복하지 않을 테니까요.” 서방의 기자가 위험천만한 모험을 감수해가며 북베트남 진영에 들어가 호치민의 모습과 육성을 카메라에 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인터뷰는 대단한 반향을 불렀다. 공격을 당하는 입장에서 전쟁을 본 기자가 그만큼 드물었다. 방송이 적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 전쟁을 어떻게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철저하게 ‘미국’이라는 프레임에 갇힌 서방 언론의 너절한 기사 뭉치 한가운데서 유독 찬란한 빛을 발했던 이 인터뷰의 주인공은 그로부터 20여 년 전, 그러니까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직후인 1945년 9월에 서방 기자로는 최초로 히로시마에 들어간 장본인이기도 했다.

윌프레드 버체트(1911~1983). 원폭이 투하된 직후 600여 명에 이르는 연합국측 기자들이 미주리(Missouri) 함상에서 열린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에 정신을 빼앗겨 있는 동안 호주 출신의 기자 버체트는 위험을 무릅쓰고 혈혈단신 히로시마로 들어간다. 그보다 한발 늦은 1945년 9월 3일 히로시마를 방문한 미국 기자단은 폐허로 변한 도시를 둘러본 뒤 가공할 새로운 무기의 위력에 대해 만족감을 표시했다. 기자들은 원폭 피해나 후유증 따위에는 애초부터 아무 관심이 없었다. 당시 미국 기자단 중에서 가장 유명했던 <뉴욕타임스>의 과학 담당 기자 윌리엄 로렌스(William L. Laurence)에게는 오로지 폭탄의 위력만이 관심사여서, 원폭 희생자들도 폭탄 성능에 대한 증거물로 관심을 끌 뿐이었다. 버체트는 이 책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히로시마가 황폐화된 것이나 평화라는 대의는 그에게는 관심 밖이었다. 이와 같이 원자폭탄의 위력에만 초점을 맞춘 것은 비단 <뉴욕타임스>의 로렌스 기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 미국정부의 정책이자 점령군의 정책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을 한 편의 기사가 작성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히로시마에 잠입해 잿더미로 변한 도시를 돌며 원폭 피해의 생생한 참상을 목격한 버체트는 자갈더미 위에 앉아 구식 타자기를 두드려 자기가 본 것들을 가능한 한 길고 자세하게 쓰기 시작했다. “후속 기사를 곧 보낼 수 있다는 보장이 없고, 돌아가는 길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 기사에 가능한 한 많은 내용을 담았다.” 이 기사는 일본의 관영통신사 도메이(同盟, 오늘날 교도통신의 전신)의 히로시마 주재기자가 모르스 전신기를 꾹꾹 눌러 도쿄로 보냈고, 도쿄에 머물고 있던 버체트의 동료 기자에게 전달돼 운 좋게도 영국 일간지 <데일리 익스프레스> 1면에 실리게 된다. ‘선발된 기자단’이 원자폭탄의 막강한 위력에 관해 어떤 기사를 쓸까 궁리하던 그 때, 히로시마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하는 버체트의 특종 기사가 ‘원자병’(The Atomic Plague)이라는 제목을 달고 전 세계로 타전된 것이다. 이 기사는 미국 핵무기계의 거물들을 머리끝까지 화나도록 만들었고, 이윽고 버체트의 기사 내용을 부인하기 위한 기자회견이 점령지 도쿄에서 열리게 된다. 버체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 버체트의 특종 기사
내가 자리에서 일어섬으로써 잠시 극적인 순간이 있었다. 나의 첫 번째 질문은 브리핑한 장교 본인이 히로시마에 갔다 온 적이 있느냐는 것이었는데 그는 가보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 그와 나 사이에 질문과 답변이 오가다가 마침내 나는 도심을 흐르는 강물의 물고기들이 지금도 죽어가고 있는 데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그 물고기들은 폭파 때문이거나 아니면 강물이 뜨거워졌기 때문에 죽은 게 틀림없소.”
“한 달이나 지났는데도 그렇단 말입니까?”
“그 강은 간만의 차이가 있소. 물고기들이 쓸려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수도 있는 것이오.”
“하지만 나는 어떤 교외에서 팔팔한 물고기들이 강물의 어떤 지점에 가면 그대로 배가 뒤집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고는 몇 초도 안 돼 죽고 말았지요.”
대변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당신은 일본측 선전에 말려든 것 같소”라고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감사하다”는 의례적인 맺음말과 함께 기자회견은 끝났다. 방사능에 대한 나의 주장은 부인되었지만 히로시마는 이내 들끓기 시작했다.

버체트의 기사로 점령군측이 상당한 당혹감에 빠졌다는 것은 분명했다. 기자회견 직후 점령군은 과거의 우리의 ‘보도지침’에 비견될 만한 보도금지조항을 즉각 발표했다.

①기사는 엄격히 사실에 입각해야 한다.
②직접·간접으로 공공의 안녕에 영향을 끼치는 어떠한 것도 이를 금지한다.
③사실이 아닌 것과 군에 대해 편견을 갖게 하는 어떠한 것도 보도되어서는 안 된다.
④군에 해를 끼치는, 즉 군에 대한 증오나 불신을 조장하는 어떠한 것도 금지한다.

이 조항에 따라 모든 보도기사에 대한 사전검열이 이뤄졌다. 원폭 관련 증상의 치료법을 포함해 모든 언론 보도가 금지되었다. 원폭 피해에 관한 이야기는 신문과 잡지는 말할 것도 없고 학술지에서도 사라졌다. 반면, 원자폭탄의 위력에 관한 기사는 군으로부터 크게 환영받았다. 최초의 핵전쟁으로 도취감에 한껏 젖어있었던 서방 세계는 이렇듯 원폭의 후유증을 감추기 위한 은폐 공작을 일사천리로 진행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버체트가 지적한 대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시민들은 고의적인 의학실험의 희생자인 동시에 냉전의 정치적 희생물이었다. 원폭 투하 이후 무려 37만 명이 직·간접적인 피해와 고통을 호소했다. 버체트는 이후 여러 차례 히로시마를 다시 방문해, 반세기 가까이 비밀주의와 배타주의에 가려진 원폭 투하의 진실을 끈질기게 추적해 밝혀낸다. “원자폭탄의 사용이 전쟁을 단축시키고 수십만 미국인의 생명을 구할 것이라는 제2의 대사기극이 연출되었다. ‘미국인들의 생명을 구하자’는 구호는 후에 베트남 전쟁에서 부녀자, 어린이, 심지어 품속의 아기들까지도 죽인 밀라이(My Lai)의 대학살 그리고 그와 유사한 수많은 학살사건을 정당화하기 위한 구역질나는 공식이 된다.”

이 책은 원폭 투하 과정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비롯해 미국의 지배 권력이 저지른 가공할만한 비인도적, 반인류적 의사 결정 과정과 더불어 핵공격의 끔찍한 결과와 후유증에 대한 언론의 사실 보도를 막는 공식적인 은폐 정책의 존재를 낱낱이 폭로하고 있다. 히로시마를 취재한 이후 버체트는 이런 인류사적 비극에 맞서는 적극적인 평화주의자가 되어 평생을 반핵 운동에 헌신했다. 서방의 기자들이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의 항복이라는 희대의 사건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홀로 ‘현장’을 선택한 버체트는 “그들의 마음은 과거에 머물러 있었고 나의 마음은 미래를 향했던 것이다”라며 책의 발간이 늦어진 것을 사과하는 보기 드문 양심-베트남 전쟁 당시 국방부 기밀문서(Pentagon Papers)를 폭로한 대니얼 엘스버그 역시 훗날 자기가 더 일찍 문서를 공개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까지 보여주었다. 냉전은 끝났지만 아직도 핵전쟁의 공포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요소의 하나로 남아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우리는 1945년의 원폭 투하로 기나긴 일제 강점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지구 유일의 냉전지대 한반도에서 우리는 반세기가 넘는 시간을 끊임없이 핵의 위험을 우려하며 살아가고 있다. 때문에 ‘히로시마’는 분명 과거였지만, 그것은 여전히 인류의 생존이라는 ‘미래’를 위협하는 현재진행형의 문제인 것이다. 고결한 정신과 뛰어난 필력이 한 데 어우러져 빚어낸 이 주옥같은 저작은 인류가 만들어낸 핵이라는 괴물에 인류가 스스로 무릎 꿇는 처참한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도록 전 세계에 보내는 날카롭고도 준엄한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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