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돼먹은 영애씨> 시즌5 첫방이 동시간대 시청률 1위의 대박을 터뜨렸다. 시청률이 무려 2%였다. 그렇다. 이 드라마는 대박이되 약소한, 절정이되 밋밋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국내 케이블 자체 제작 드라마가 다섯번째 시즌을 맞은 것은 처음이다. 영애씨에는 불륜, 낙태, 강간 따위의 선정적인 그러나 드라마적인 요소도 없다. 그 흔해빠진 신데렐라 스토리도 아니다. 물론, 빅스타도 없다. 영애씨 시즌5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계약직 전락한 영애씨의 고군분투 생존기”이다.

이번 주말 기획은 시작은 미약했으나, 심히 창대해진 <막 돼먹은 영애씨>이다. 블록버스터급 막장 드라마가 양산되는 불행한 제작 환경에서 영애씨의 미덕과 20대 여성의 어떤 전형으로서의 영애씨를 찬미한다. 명장면도 잊지 않았다. 영애씨의 삶에 계급적(!) 연대의 의사를 밝힌다.

한국 드라마史에서 2년이면 ‘억겁’이다. 헤아릴 수 없는 미니시리즈들이 명멸하고, 굵직한 기획 드라마들이 살고 또 죽는다. 그리고 부르다 지칠 산산히 부서진 주인공들의 이름이 도도한 은하수가 되어 흐른다. 만약, 2년 정도 안정적(!) 시청률과 적당한 화제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드라마가 있다면, 모르긴 모르지만 영혼을 팔 PD가 분명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2년 전, 그러니까 2007년 봄의 드라마들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 <막 돼먹은 영애씨>의 첫 방송이 바로 2년 전 봄 어느 날이었다. 시즌별로 나눠가긴 했지만, 영애씨와의 막 돼먹은 만남도 어느덧 역사라고 부를 만한 시간이 쌓인 것이다. 살비듬 떨어지는 세월을 함께 한 노부부처럼, 마냥 흐뭇한 이가 나만은 분명 아닐 것이다. 영애씨에 관해 할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문득 애절해진다. 그 아스라한 시간, 영애씨를 처음 만났던 봄으로 거슬러 가보자. 어떻게? 막 돼먹게 설레게.

▲ ‘막 돼먹은 영애씨’ 시즌1에서 영애씨
언제나처럼 볼 게 많던 봄이었다. 양상은, 사극과 메디컬 드라마의 치열한 쟁투였다. 긴 설명이 부차한 <주몽>이 압도적인 가운데, 이제는 사극 전문 배우가 되어버린 최수종과 그때까진만 해도 아직 ‘달콤 살벌한’ 매력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풋도도했던 박예진이 열연했던 <대조영>도 있었다. 그리고 기억나나. 그 이름 ‘장준혁’. 베토벤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이전에도 김명민은 단연 압도적이었다. 봉달희와 버럭 범수도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었고. 어느새 일지매(정일우)와 꽃남(김범)으로 자라난 바람직한 청년들이 나왔던 또 하나의 명불허전 <거침없이 하이킥>도 그해 봄의 드라마였다. 그 봄의 드라마들은 아직도 케이블 TV의 단골 재방, 삼방 메뉴이다.

이제는 기억해야 할 역사의 한 페이지이자, 강호고수들이 난립했던 격동의 현장으로 영애씨가 온 건 뜻밖의 일이었다. 그녀는 달랑 이소룡 추리닝 한 벌 입고 왔다. 그 모양새 누가 봐도 참 막 돼먹었다. 게다가 영애씨에 대한 소개는 지금 읽으면, 완전히 촌스러워 내가 다 부끄러울 지경이다.

“세상은 막 돼먹은 여자라 부르지만, 사실은 자기 할 말은 하는 여자.”

솔직히, 아무런 기대 없었다. 우선 tvN이라고 하는 브랜드는 가끔 재주 있는 기획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지상파에 비할 수는 없는 좀 많이 후진 브랜드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땐 더, 지상파 드라마가 럭셔리한 명품숍이라면, 케이블 드라마는 철지난 혹은 싸구려 매대 상품이었다. 영애씨, 케이블 자체제작 드라마 태생이 좀 막 돼먹었다.

더군다나 영애씨는 ‘다큐멘터리+드라마’ 즉, <다큐 드라마>라고 하는 신개념을 강조했다. 역시, 새롭기 보단 싸보였다. 값싼 물건을 선전하는 확성기의 말발, 그 뻔뻔한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주인공이 김현숙이라니. ‘출산드라’는 한참 철지난 유머였다. 그녀를 주인공으로 삼다니, 이건 뭐 그냥 막가자는 거로구나 했었다.

그런데, 정말 웬걸. 이 드라마는 막연히 맛있을 거라 상상해야 하는 청담동 프랑스 요리가 아니었다. 익숙한 바로 그 맛 딱, ‘청진동 해장국’이었다. 드라마보다 더 지랄 맞은 현실의 진리 그리고 노처녀의 원형질에 대한 주옥같은 관찰이었다. 그 통찰력, 생경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장이라도 브라운관 밖으로 뛰어나올 태세의 그녀는 참을 수 없이 매력적이었다.

그 마력 같은 매력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첫눈에 반하는 원리가 때때로 익숙한 것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매력은 막 돼먹은 태생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사실, 드라마의 경우 엄정한 ‘시장원리’가 존재하는 영역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제작사 기반형 종합엔터기업들이 드라마 제작을 주도 아니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초록뱀, 올리브나인, 김종학프로덕션, JS픽처스, 팬엔터테인먼트 등의 소수 메이저사들이 전체 드라마 제작시장의 70~80%를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돈이 되는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선 막대한 돈이 투자되어야 하는 악순환. 언젠가부터 드라마는 그 막대한 돈을 안정적으로 회수해야 하는 목적에 영혼이 잠식된 시장이 되었다. 세상에 돈으로 모험을 하려는 투자자는 없다. 그래서 케이블 자체 제작이 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지상파 중심의 독과점적인 드라마 구조는 불변하고, 디지털 시대에 급증하는 방송영상물의 수요는 아시다시피 지상파의 재방, 삼방으로 채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영애씨의 매력은 원했건, 원치 않았건 그 불온한 구조 밖에서 도달한 아름다움이었다.

선정성, 편향성, 상투성 등 기존 드라마의 것이라고 덩어리져지는 것들의 한계와 부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선언적 실험과 시도를 넘어 일상적으로 방송에 안착하는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진부한 ‘막드’(막장 드라마)가 방송 전체의 낯짝을 불편하게 하고 있는 요즘이기도 하다. 뭐랄까, 영애씨는 열 막장 아니 부러운 단 하나의 막 돼먹음이다.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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