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시위자에 대한 처벌이 약하다? 최근 조선일보에서 열심히 이렇게 떠들고 있다. 지난 11일자 1면 “‘폭력 촛불’ 솜방망이 처벌”이란 기사에서는 “촛불시위를 전후해 정부는 ‘법질서 확립’을 외쳤지만, 정작 불법을 단죄해야 할 사법부는 관대한 처벌로 일관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어 오늘 13일 ‘취재일기’를 통해 “‘촛불’에 약한 ‘솜방망이’ 판사들”이라며 직접 사법부를 겨냥하고 있다. 신영철 대법관이 이메일l, 전화, 면담 등을 통해 판사들에게 ‘촛불’ 관련 판결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솜방망이 식으로 접근하던 조선일보가 이제 되레 사법부에서 촛불관련자들에게 약한 처벌을 내리고 있다며 홍두깨를 휘두르는 셈이다.

그런데 난 왜 이런 기사를 볼 때마다 억울한 생각이 드는 걸까.

▲ 3월 11일자 조선일보 1면 기사
2008년은 그야말로 미국산쇠고기 반대 촛불집회가 단연 큰 이슈였다. 졸속협상, 굴욕협상이란 비판을 받으며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바닥을 쳤고, 그 덕분에 당선 1년도 채 되기 전에 ‘퇴진’해야 한다는 요구가 거셌던 한 해다. 당시 촛불집회는 수많은 기록들을 남기기도 했다. 촛불집회가 생중계되는 등 1인 미디어 시대가 가속화됐다는 평가들이 있고, 촛불소녀·예비군부대·유모차부대·의료단의 등장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다음 아고라·82쿡닷컴·소울드레스·촛불다방이 크게 주목을 받았으며, 새로운 소비자운동의 일환인 조중동광고불매운동이 시작됐고, 경찰은 명박산성으로 국민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숫자에 대한 기록도 대단하다. 공식 촛불집회 기간만 100일이 넘는다. 촛불집회에 최다 인원이 참여했던 6월10일 총 70만명(서울 기준)이 모였다. 물론 경찰추산은 8만명이었다. 그러나 이 숫자들 뒤에는 연행자들이 있었다. 촛불집회로 인한 연행자 총 1288명(17명 구속, 1136명 불구속 입건). 그 연행자 1288명 중 한 사람이 바로 ‘나’다.

내가 연행됐던 날은 거리행진이 시작된 지 4일째 되던 2008년 5월27일 화요일. 서울시청광장에서 촛불집회 참가자 113명이 무더기 연행되었던 바로 그날이다. 난 당시 화요일마다 문지문화원에서 진행한 ‘문화담론의 정치적 무의식’ 강연을 들었고,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보통 강연은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됐지만 그 날은 9시40분이 넘어서야 끝났고, 나는 바로 명동으로 갔다. 오랜만의 ‘나들이’었다고 해두자.

명동성당 근처 사거리에서 전경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보아하니 촛불집회 참가자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투입된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았지만 별로 신경 쓰진 않았고, 명동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집으로 가기 위해 천천히 시청 쪽으로 걸어왔다. 당시 살고 있던 집에 가기 위해서는 광화문 사거리 근처에서 버스를 타야 했다. 그러나 시청광장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길은 막혀 있었다. 시청광장 프라자호텔 앞에서 시위대들과 전경들이 대치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 후 시위대 1인이 청계천광장에서 조용히 정리 집회를 하고 해산하기로 경찰과 약속했다며 청계광장으로 가자고 했고, 시위대 앞을 막고 있던 전경들은 빠르게 시위대의 길을 터줬다.

난 이때다 싶어 시위대의 뒤를 따라 횡단보도를 통해 시청광장으로 넘어갔는데, 순간 전경들은 시청광장 자체를 둘러쌌다. 시위대는 전경들에 의해 고립됐고 나 역시 꼼짝없이 그 안에 갇혔다. 그리고 경고방송이 들려왔다. “지금 즉시 해산하기 바랍니다. 아니면 강제연행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집에 갈 테니 길을 비켜달라고 애원했지만 끝까지 전경들은 길을 터주지 않았다. 경찰은 곧 “야간 미신고 집회를 했고 불법적으로 도로를 점거했으니 곧 연행하겠다”며 이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난 그렇게 경찰들에 의해 야간 옥외집회 참가와 도로 무단점거 등 혐의의 현행범으로 연행됐다.

▲ 29일 촛불문화제가 열리고 있는 덕수궁 앞 서울시청 광장 모습 ⓒ 정영은
처음에는 별로 당황하지는 않았다. 촛불집회를 찬성하건 반대하건 그 무엇을 떠나 ‘공식적’으로 난 그날 집회를 참석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풀려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건 나의 짧은 생각이었다.

담당 형사는 내가 촛불집회에 참석했다고 확신하듯이 이야기했다. 아무리 당시 정황을 이야기해도 막무가내였다. 최근 “촛불집회가 열리는 것을 알고 있었냐”고 묻기에, “신문과 방송에서 보도되는 것을 보고 알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촛불집회에 참석했던 적이 있었냐”라고 물었다. 난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며 “대답하지 않겠다”고 했고 당일(27일)에는 촛불집회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형사는 “촛불집회가 열리는 걸 뻔히 알면서 왜 거기를 갔냐”, “프라자호텔 앞에서 왜 시위대를 따라서 횡단보로를 건넜느냐”고 따져 물었다. 나는 “집에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 건넌 것이고, 경찰들이 청계광장에서 정리 집회하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아무 문제없을 것 같아서 시위대 뒤쪽을 따라갔을 뿐”이라고 답했지만 형사는 솔직하게 이야기하라고 윽박질렀다.

그리고 2차 조사를 받으러 다시 담당 형사를 만났다. 내가 시위에 참가했다는 증거라도 찾은 듯 사진을 들이댔다. 3장의 사진. 그러나 그 사진들은 이미 전경들에 의해 청계광장에 갇힌 이후의 사진들로, 그 어떤 것도 내가 집회에 참가했다는 증거는 되어주지 못했다. 사진 속의 나는 피켓이나 촛불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48시간을 거의 채우고 나서야 유치장에서 나올 수 있었다.

당일 경찰의 연행에는 두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첫째, 인도에서 연행한 그야말로 ‘불법연행’이란 것이다. 시위대는 도로를 점거한 적이 없었다. 횡단보도를 통해 시청광장으로 넘어갔고 경찰은 그 시청광장 안에서 사람들을 연행했다. 이는 형법상 일반교통방해죄에 해당되지 않는다. 둘째, 경찰은 해산방송을 했는데도 해산하지 않아서 강제 연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경찰들에 의해 둘러싸여 해산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날 시청광장에는 시위대와 경찰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수많은 기자들과 전경테두리 밖에는 시청을 지나가는 시민들이 있었다. 내가 연행됐던 바로 다음날 대책위에서는 연행자 석방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어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고, 언론매체에서도 당시 촛불참가자들이 억울하게 연행됐다고 전했다.

▲ 5월 29일 한겨레 1면 사진 기사
그렇게 나에게 당시의 기억은 희미해져갔다. 그러나 얼마 전 같은 유치장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벌금형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확인해본 결과, 나도 벌금 100만원에 약식기소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당일 집회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경찰에서도 내가 참석했다는 증거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난 거금 100만원의 벌금에 처해졌다. 알아보니 벌금을 받았다는 것은 전과로 기록이 남는다고 한다. 이것이 내가 연행되고 벌금이 떨어지기까지의 전말이다.

물론 벌금이 세게 나올 거란 것은 이미 예고돼 왔다. 경찰에서는 “시위 참가자들이 경찰차로 연행되는 과정을 ‘닭장투어’로 부를 정도로 공권력을 무시하는 풍조가 만연했다는 점에서 벌금액이 과거에 비해 높아질 것”이라고 언론에 흘려왔다. 그래도 이건 너무 심했다. 촛불 연행자 1인에게 보통 100만원의 벌금이 때려진다면 약 10억원이 넘는 셈이다. 최근 이명박 정부에서 부자들에 대한 감세조치가 유행인데, 정부정책에 반대한 사람에게는 한 치의 아량도 없이 벌금 폭탄을 매기는 대한민국이다.

조중동에서는 촛불집회 관련된 사법부의 판단이 솜방망이라고 문제 삼지만, 나는 단지 벌금형을 받은 것이 억울할 뿐이다. 분명히 이야기하지만 나는 ‘미신고 야간옥외집회’, ‘일반교통방해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리고 ‘야간 옥외집회금지’는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억울한 사람이 과연 나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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