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가요는 시대와 운동을 기록한다. 공안탄압의 시대에는 국가권력을 비판하는 노래가 많았다. 민주노조 운동이 활발하고 이념과 사상에 관한 이야기가 불붙었던 시기 민중가요는 또 달랐다. 국가보안법 철폐와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노래가 집중적으로 불린 시기가 있고,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추동하는 노래도 많았다. 구체적으로 노동 관련 악법을 철폐하자는 노래도 유행했다. 활동가들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노래도 불렸다. 과감하게 “불법으로 투쟁하자”고 선동한 시기도 있었다. 김민기와 김광석의 노래들은 대학가에 큰 울림을 줬고, 학생회실과 동아리방에서는 ‘좋은친구들’과 ‘조국과청춘’의 노래가 통기타 반주와 함께 흘러나왔던 때가 있었다.

민중가요는 운동의 주체를 기록한다. 바로 지금, 한국사회 최말단에 있는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진짜 사장이 나와라>라는 노래를 부르는 이유다. 돌이켜보면 사회운동의 새로운 주체들이라고 할 수 있는 비정규직, 여성, 이주노동자에 관한 민중가요가 ‘대중적으로’ 불리기 시작한 때는 아마도 2000년 전후다. 비정규직에 대한 대표적인 노래인 <비정규직철폐연대가>가 나온 때가 2004년이다. 이 노래의 2절은 “나서라 하청노동자 탄압 착취를 뚫고서 굴욕과 상대적인 박탈감 장벽을 넘어”로 시작하는데, 비정규직의 현실을 이 노래만큼 잘 표현하는 노래는 없었다. 이 노래는 최저임금도 못 받던 청소노동자가 있던 대학에서부터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집회 현장까지 쉴 새 없이 불렸다. 이 노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싸움이 본격화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이 노래를 쓴 ‘노동가수’ 김성만씨는 “불안정노동철폐연대에서 비정규직에 관한 노래를 의뢰했고, 현장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모았다. 구호를 외치는 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모습을 보고 ‘나의 손 높이 솟구쳐’로 시작하는 가사를 썼다. ‘가사가 너무 처참하다’ ‘노동자를 둘로 가르는 것 아니냐’며 가사를 바꾸는 게 좋겠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바꾸지 않았다. 비정규직 현장에서는 ‘진짜 우리 이야기다’라는 반응이 많았다”고 전했다. 그는 2003~2004년을 회고하며 “그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싸움이 갈수록 터져 나올 것이고, 그래서 비정규직과 이들이 싸우는 현장에 관한 노래가 많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노동가수 김성만 (사진=미디어스. 누르면 다른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투쟁가의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도 많은 문화노동자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과거에 비해서 ‘운동으로 민중가요’는 그 세가 줄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재생산의 문제이기도 하고, 전체 운동이 그만큼 위축됐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파업가>조차 부르지 않는 현장이 많다. 민중의 애국가인 <임을 위한 행진곡>을 생략하는 현장도 있다. 한편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투쟁가 대신 <대한민국 헌법 제1조>와 같이 아주 짧은 노래나 대중가요가 집회판에 올라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 민중이 부르는 노래가 민중가요다’라고 생각하고, 많은 시민들이 함께 부를 노래를 만드는 것이 진보진영이 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전통적인 의미의 민중가요는 역할이 좀 다르다. 민중가요는 현장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김성만씨는 “이제는 투쟁가를 부를 수 있는 가수들을 손가락으로 꼽게 됐다. 대신 다른 사람들이 올라온다. 홍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나 대중가수들이다. 어떻게 보면,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일은 그분들이 더 잘 한다. 어떤 피 튀기는 현장도 이들이 오면 난리가 난다. 서운하냐고 물었는데, 이제는 다양성 없이는 노동문화도 없다. 생각해보면 민중가수들이 제 역할을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노래를 가르치고 함께 불렀다. 그러다 이제는 노래를 보여주는 것으로 넘어왔다.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것만으로 대중과 함께 한다고 말할 수 없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민중가수들이 현장에 지속적으로 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들이 투쟁가를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현장에 지속적으로 연대해야 하고, 철저하게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그는 그런 삶을 살아왔다. 그 스스로 노동자 출신에 산업재해를 당해 받은 보상금으로 기타를 사들고 노래를 시작했다. 19980~1990년대에는 성남과 이천에서 노동자들에게 노래와 기타를 가르쳤고, 수많은 투쟁 현장에 결합했다. 2000년대에는 역시 같은 생각으로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노래인 <비정규아리랑>, 청소노동자들의 노래 <날아라빗자루>, 타워크레인 노동자들의 노래 <하늘로 출근하는 사람들>을 썼다. 그를 세상에 알린 노래 <불패의 전사들>은 삼영전자 노조의 싸움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그 현장에서 패배를 목격했다. 쌍용차 옥쇄파업 당시 현장에 있었던 유일한 문화노동자였고, <쇳밥>이라는 노래도 그래서 나왔다. 그는 이랜드 노동자들의 점거 투쟁에 함께 하면서 노래를 만들고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지금도 그는 기아차 비정규직의 고공·노숙농성장의 투쟁문화제를 매주 책임지고 있다.

▲김성만씨가 매주 연대하는 기아차 비정규직 고공농성장의 모습 (사진=미디어스)

그는 “현장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꼭 필요하고, 더 많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화노동자들은 갈수록 줄고 있다. 문화운동과 사회운동이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으려면, 문화노동자들이 계속 현장에서 노래를 만들고 부를 수 있으려면, 이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김성만씨는 민주노총과 산별노조가 문화노동자를 고용하거나 생계비를 지원하면서 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큰 집회가 있을 때 가수를 부를 게 아니라, 이 판의 가수들이 현장에 지속적으로 연대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투쟁도 노래도 계속 해나갈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이른바 ‘민중가수 출연료 후려치기’ 논란도 운동적 방법으로 풀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칠레의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가 ‘민요 같이 부르기’ 운동을 한 것처럼 여러 가지 시도를 해야 한다. 투쟁가를 못 부른다고 무대에 올리지 않는 것은 안 된다. 다양성을 포용해야 한다. 대중을 선동하는 데에 투쟁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좀 더 밝은 노래와 퍼포먼스가 필요하다. 그리고 현장에 가서 지속적으로 연대해야 한다. 현장과 노동자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노래를 만들고 불러야 한다. 노래는 가장 소중한 운동의 무기가 될 수 있고, 그 자체로 운동이 될 수 있다. 우리를 싸게 활용해라. 대신 자주 많이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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