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서구의 ‘록 뮤직’을 추종한 탓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 운동권 초년생이 되어 파시즘에 대한 여러 비판들을 접하게 되면, 이런 식의 관심은 당연히 확대될 수밖에 없다. 이른바 ‘투쟁의 현장’에서 분위기 고양을 위해 민중가요니 투쟁가니 하는 노래들을 열심히 따라 부르지만, 예술을 도구적으로 활용한 역사적 사례의 대표 격은 역시 파시즘 체제이기 때문이다.

나치즘이 체제 강화를 위해 만들어 낸 영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1934년 <의지의 승리>일 것이다.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표현한 이 작품은 나치를 위대한 존재로 묘사하는데 영화의 모든 기술을 쏟아 부었다. 당시 나치 내각에서 선전상을 맡았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영화를 통한 체제선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인기 스타와 유명 감독을 포섭하는데 공을 들이기도 했다.

체제를 수호하려는 자가 예술을 동원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은 예술 그 자체가 갖는 성격 때문이다. 단적인 예를 들면 언론이 공들여 취재한 결과물인 수 십 페이지의 기사보다 <부러진 화살>, <도가니> 또는 <변호인>과 같은 영화들이 훨씬 더 큰 대중적 파급력을 갖는다. 반전운동에 참여를 요구하는 백 마디 말보다 밥 딜런의 <Knocking On Heaven’s Door>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는다.

우리는 글씨에 담긴 논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익숙하지 않지만, 스크린이나 스피커 같은 눈과 귀를 통한 설득에는 쉽게 마음을 연다. 그렇기 때문에 체제는 예술을 활용해 자신들의 비정상적 조처들에 대한 국민들의 동의를 쉽게 얻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를 하는 것은 오직 ‘체제’뿐만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예술가는 같은 욕망을 갖고 있다. 자신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문법적 체계에 의존한 수단이 아닌, 영화, 그림, 음악 등 감성에 직접 호소하는 형식에 실으려는 모든 시도가 예술이다. 만일 이 예술가가 혁명의 한 가운데 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볼셰비키 치하의 1917년 페테르부르크 거주민들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작품’들을 만들고 즐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함 포템킨> 중 민간인들이 계단에서 학살당하는 장면

이런 분위기들을 고려하면 괴벨스 이전에도 체제 유지를 위한 근대 예술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전함 포템킨>, <파업> 등 영화와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 영화들은 당시 러시아 혁명에 참여한 주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주체들이 만들었음을 자처하는 체제 옹호의 역할을 떠맡고 있다.

그렇다면 예술에 있어서 에이젠슈타인의 시도와 나치의 차이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발터 벤야민의 틀을 떠올릴 수 있다. 벤야민은 파시즘이 ‘정치의 예술화’라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이에 맞서기 위해 ‘예술의 정치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언뜻 보면 말장난 같지만 사실 이러한 개념 구분은 벤야민의 진의가 어쨌든지 간에 상당 기간 구 소련식 예술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정치의 예술화란 개념은 정치 그 스스로가 피지배계급에게 있어서 충분한 정당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체제의 옹호를 위해 예술이 동원되는 현상을 표현한 것이다. 예술의 정치화는 이와는 정반대의 경로를 상정한다. 예술이 원래 갖고 있는 고유한 역할을 다 할 수 있다면, 이는 결국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정치적 성격을 갖게 된다는 게 핵심이다. 이는 단순화시켜서 본다면 마치 노동계급이 가진 고유한 혁명적 속성을 옹호하려는 것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이 도식 안에서 노동계급의 이익 추구에서 인류 전체의 이익이 도출되는 것처럼, 벤야민의 도식 안에서도 예술이 가진 고유의 속성을 추구하는 것과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은 서로 만날 수밖에 없게 된다.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바에 의하면 이러한 생각과 비슷한 맥락에서 예술에 어떤 ‘형식’을 부여한 것이 게오르그 루카치이며, 이는 스탈린주의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까지 이어졌다.

구 소련의 예술에서 ‘민중의 자생적 표현’과 ‘지배이데올로기의 강화’가 도대체 어느 시점에 분리됐는지를 규정하는 건 쉽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이후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도그마로 기능하게 됐다는 거다. 파시즘의 수단이었던 정치의 예술화가 스탈린주의 체제에서 그대로 반복되었다. 소련의 역사를 겪고 나서야 우리는 예술의 역할에 대한 루카치식 규정의 적실성을 따져볼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의 역사가 만든 민중예술의 운명은 이런 인식의 변화들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민중가요’로 불리는 어떤 음악의 역사들을 되짚어보면 더욱 그렇다. 1970년대 후반 새로운 전기를 맞은 문화운동은 당시 학생운동권에 돌던 혁명적 분위기와 만나 다채로운 형태로 변화했다. 정권의 검열과 정치적 압력이 예술을 찍어 누르던 시기에 현재를 비판적으로 보고 미래에 대한 낙관을 묘사하는 노래들이 주로 불렸지만, 사회운동이 성장하면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나 민족주의적 감수성을 좀 더 노골적으로 담고 있는 곡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노동운동이 사회운동의 또 다른 중심축으로 등장하면서 형식에 있어서도 또 다른 변화상이 나타나게 됐다. 복잡한 구성에 익숙할 수 없는 노동자들이 집회 장소에 모여 단순하게 따라 부를 수 있는 ‘투쟁가’ 형태의 노래들이 탄생한 것이다. 한총련으로 대표됐던 학생운동권 역시 대규모 집회의 시대를 맞이함에 따라 투쟁가의 일부 요소를 차용한 시도를 했다.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 노래패였던 <조국과 청춘> 3집 표지

시기를 도식화해서 구분하는 것에 무리가 있지만, 적어도 1990년 소련이 붕괴된 이후 또 다른 형식상 내용상의 논란이 불거졌다. 밴드 구성의 록 음악을 형식으로 한 노래가 민중가요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했고, 아예 시대의 유행이었던 댄스 뮤직을 시도하는 사례도 있었다. 또 한편에서는 ‘한국적 포크’의 성과들이 등장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출신의 가수에 대한 변절 논란 역시 벌어졌다. 이런 일련의 상황은 한국의 현실을 반영한 문화예술론이 표류하는 상태에서 ‘사회 비판과 상업적 성과의 추구’라는 이분법적 대결구도가 예술의 형식을 규정하고, 다시 이를 예술이 형식을 통해 반박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로 볼 수 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일원이었던 가수 안치환 씨 (연합뉴스)

오늘날 사회운동이 침체된 현실을 앞에 두고 다시 민중예술은 심각한 고민을 안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사회운동이 여전히 내리막을 걷고 있으나 현실적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른바 민중가요는 집회와 시위 현장의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전략을 고수해야만 했다. 비판적으로 표현하자면 정치의 예술화가 아닌 ‘집회의 예술화’이다. 그런데 이제 그조차도 쉽지 않은 시대의 민중가요는 언뜻 볼 때 사실상 그 생명력을 다한 것처럼 보인다.

예술의 본분을 다하려는 사람들이 아직도 노력을 하고 있는 이상 민중예술에 사망선고를 내리는 것은 아직 이르다. 오히려 우리가 보지 못한 곳에서 이른바 민중가요를 만드는 예술가들은 또 다른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러한 시도가 상업적 성과와 사회비판을 구분하고 사회운동의 ‘도구’를 자처하며 형식적 보수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민중예술의 운명을 결과적으로 구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들의 고민을 직접 듣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다. 예술이 예술의 역할을 다 할 때 오히려 정치적 힘을 갖게 된다는 명제는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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