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새벽 1시께, 강남 한복판에서 20대 여성이 이유도 모른 채 살해됐다. 타인에게 근거 없는 피해망상을 느끼는 ‘조현병’을 앓고 있던 김모 씨는 상가 건물 남녀 공용 화장실에 숨어 있다 범행을 저질렀다. 남성 6명이 잇따라 화장실에 들어갔지만 아무 일도 없이 나왔던 것과 달리, 여성이었던 피해자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다.

범행 장소 부근인 강남역 10번 출구에서는 18일부터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다. ‘단지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거나, ‘살女주세요 너는 살아男았잖아’, ‘여자라서 숨쉬기도 힘들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호소의 메시지들이 강남역을 뒤덮었다. 새벽에도 유동인구가 많은 강남역 부근이었고 CCTV도 있었지만 범행을 막아 줄 방패가 되진 못했다.

경찰은 범행 동기가 뚜렷하지 않고 범행부터 도주까지 체계적인 계획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신질환에 따른 무동기 범죄라고 결론 냈다. 하지만 가해자가 화장실에 들른 ‘첫 번째 여성’이었던 피해자를 흉기로 찔러 죽인 후 경찰 조사에서 “여자들에게 항상 무시당했다”고 밝힌 점, 지난해 폭발적인 관심 속에 주목 받았던 ‘여성혐오 현상’이 ‘살인’이라는 직접적 ‘위협’으로 실현됐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여성혐오 범죄’로도 명명되고 있다.

서천석 서울신경정신과 원장 역시 “정신병을 가진 사람이 범죄의 이유로 ‘여자들의 무시’ 운운하는 상황이 여성혐오 이슈를 우리가 중요한 문제로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면서 “이 사건은 분명한 여성혐오 범죄”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이 같은 사건의 배경과 맥락을 짚으려고 노력한 보도는 지상파 방송사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MBC는 메인뉴스에서 경찰의 심리분석 결과를 근거로 ‘여혐 범죄가 아니다’라고 가장 단정적으로 보도했다.

“여섬혐오 범죄 아냐”… 가해자 ‘정신질환’ 강조

19일부터 관련 보도를 시작한 MBC <뉴스데스크>는 <'강남역 묻지마 살인' 추모 물결, 여혐 아닌 피해망상 추정>을 통해 제목에서부터 이 사건이 ‘여성혐오’로 인한 게 아니라는 점을 명시했다. <뉴스데스크>는 20일 <나흘째 이어진 강남역 '포스트잇' 추모, 본질은?> 리포트에서도 “도심 한복판에서 발생한 범죄에 대한 분노와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는 심리적 공황이 더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20일 <뉴스데스크>에는 “경찰이 ‘여성혐오 범죄로 단정할 수 없다’고 했지만, 추모 현장을 찾은 사람들은 불안하다고 호소했다”며 “특히 피해자와 같은 또래인 젊은 여성들은 불특정 약자를 향한 폭력의 위험성에 공감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는 했다. 그러나 19~22일 4일 동안 <뉴스데스크>는 “무차별 범죄에 희생된 여성”, “묻지마 살인”, “강남역 묻지마 살인 사건으로 희생된 여성”, “묻지마 범죄에 대한 불안감” 등의 표현으로 이번 사건을 ‘여혐 범죄’와 분리하려는 일관된 기조를 보였다.

19일 방송된 MBC <뉴스데스크>

<뉴스데스크>는 22일 <"강남 화장실 살인은 정신질환자의 '묻지마 범죄'"> 리포트로 쐐기를 박았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에 대한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정신질환자의 '묻지마 살인'으로 결론 내려졌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믿는 전형적인 망상 증세를 드러냈다”, “화장실에 온 여성을 보자마자 공격하고 범행 동기가 체계적이지 않은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 등의 설명 이후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란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남역 10번 출구에서는 매일 밤 여성 대상 범죄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는데도 <뉴스데스크>에서는 이런 배경과 분위기가 잘라내진 뉴스가 나왔다.

MBC 내 제3노조인 MBC노동조합 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세의 기자도 이번 사건을 ‘여혐 범죄’로 보는 시각을 비판하는 글을 SNS에 게시해 논란이 됐다. 김세의 기자는 사건 이후, 이태원 살인사건과 지존파 연쇄 살인사건 등을 예로 들며 이번 범행은 혐오 범죄가 아니라 정신질환자의 살인임을 거듭 강조했고, 남성에 대한 적대감을 조성해서는 안 되고 이 때를 틈타 특정 정치세력이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미친 살인범이 저지른 범행을 ‘남자가 여자를 죽인다’고 몰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글귀는 그의 견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공교롭게도(?) 그의 이러한 의견은 <뉴스데스크> 보도와 결을 같이 했다. MBC 보도에 관계하는 주요 직책의 인사들이 대개 이러한 의견을 갖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 걸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사회적 맥락 짚은 SBS, 평이한 보도 선보인 KBS

반면 SBS <8뉴스>는 경찰의 조사 결과를 충실히 전하면서도 이번 사건을 ‘여혐 범죄’로 볼 수 있는 이유를 파고들었다. MBC와 마찬가지로 ‘묻지마 살인’이라는 용어를 썼지만 <여성만 노린 범죄…강남 한복판 '묻지마 살인'>이라는 리포트 제목이나, “범행 대상으로 삼을 여성이 들어오길 1시간 반가량 기다렸던 것”, “최근 '묻지마 범죄'가 잇따르는 가운데, 이번 사건이 여성만을 노린 범죄로 알려지자 시민들은 큰 충격을 받은 모습” 등의 설명으로 ‘여성’이 타깃이 됐다는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19일 <"내가 살아남은 건…" 강남역 뒤덮은 추모글>에서는 “여성 혐오가 요즘 많이 문제시되고 있는데, 정말 아무한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구나 실감하고 있어서…”라는 시민 인터뷰와 “내가 살아남은 건 단지 우연히 그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추모객들은 이런 생각들을 글로 남기며 여성만을 노린 묻지 마 범죄를 규탄했다”는 기자 멘트로 단순한 정신질환자의 이례적 범행이라는 ‘규정’에서 한 발 더 나아간 모습을 보였다.

20일 <"여성 혐오 범죄"…거리로 쏟아진 분노 물결> 리포트는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대다수 여성들의 관점을 가장 잘 보여준 보도였다. <8뉴스>는 “여성 혐오에 대한 분노, 약자에 대한 보호막이 부족한 현실에 대한 자괴감, 이런 공감대가 추모의 상징인 이 장소로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있다”는 앵커 멘트를 시작으로 이번 사건을 여혐 범죄로 볼 수 있는 이유를 파고들었다.

SBS <8뉴스> 20일(위), 22일자 보도

“경찰은 피의자가 정신질환자이기에 여성 혐오 범죄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성이기에 피해자가 된 사건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기자 멘트와 “자기가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여성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가 살인을 한 것”, “(분노를) 불특정 여성에게 표출을 한 것 같다. 여성 혐오 범죄가 맞다고 생각이 든다”는 시민 인터뷰가 나갔고, 여성혐오가 ‘된장녀’, ‘김치녀’ 등으로 어느덧 ‘개념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현상을 언급했다.

경찰의 심리분석결과가 나온 22일, <8뉴스>는 ‘정신질환에 따른 범죄지, 여성혐오 범죄는 아니라고 강조했다’는 경찰의 설명을 전하면서도 <추모열기 확산 왜?…'여성들의 비명' 귀기울여야> 리포트에서 “일상에서 차별과 혐오를 느끼는 여성들의 불안감이 한꺼번에 분출한 것이라는 해석”이며, “강남역에서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는 추모열기는 약자인 여성들의 비명소리이며, 이 비명소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경찰의 공식적 소견을 전하면서도 얼마든지 설득력 있는 관점이 담긴 보도를 선보인 것이다.

KBS <뉴스9>는 MBC <뉴스데스크>보다는 나았지만 SBS <8뉴스>의 문제의식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평이한’ 수준의 보도를 했다. <뉴스9>는 18일 첫 보도에서 “'여성혐오'에 사로잡힌 이른바 묻지 마 범죄에 희생당한 것”,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한 젊은 여성의 안타까운 죽음에 많은 시민들은 추모 꽃다발을 놓으면서 혐오범죄를 규탄했다”며 이번 사건이 ‘혐오범죄’와 관련 있다는 점을 드러냈다.

“‘여자이기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처럼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를 비판하고, 걱정하는 내용이 많다”며 ‘여성 대상 범죄’를 규탄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알렸고, 이 같은 강력범죄 때문에 수많은 여성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는 점을 짚었다. 그러나 KBS는 엄마도 여자이기 때문에 엄마가 가져다 준 옷도 입지 않는다는 경찰관계자 발언과 범행부터 검거까지의 가해자 동선 등 선정적인 내용을 전했고, 정신질환자의 묻지마 범죄 사례 분석 리포트를 배치해 ‘여혐 범죄’보다는 ‘정신질환자의 범행’에 방점을 찍어 아쉬운 모습을 노출했다.

20일자 KBS <뉴스9>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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